문학관 마당에는 2008년 개관한 《신라를 빛낸 인물관》이 함께 살고 있다. 신라를 빛낸 위인들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천년숨결 속에 신라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전시관이다. 단층 한옥 전시공간엔 박⦁석⦁김 시조왕을 위시해 크게 세운 공으로 나라를 부활시킨 왕들이 벽면에 채워져 있다. 흥륜사 신라십성⦁원광법사와 세속오계⦁신라의 불교⦁신라의 왕⦁재상⦁충신⦁장군⦁화랑⦁학자⦁예술인⦁효행 등 43인의 신라를 빛낸 위인들이 관람객을 이끈다.-흥륜사 신라십성(興輪寺 新羅十聖)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 금당에 모셔진 승려 영정이 그려져 있다. 아도화상⦁위촉(이차돈)⦁혜숙⦁안함⦁의상⦁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불교문화를 꽃피운 고승초상화는 동강 권오창 (東江 權五昌)화백 그림이다.-원광법사와 세속오계(圓光法師 世俗五戒)화랑도 중심이념의 근본인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법사는 24대 진흥왕(540~576) 때 출가하였다. 중국 수나라에서 유학한 뒤 600년에 귀국해 신라에 불교를 발전시켰다. 청도 가실사 주지승으로 있을 때 ‘귀산’과 ‘추항’ 두 화랑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세속오계’를 지어주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에 효도를 다할 것⦁교우이신(交友以信): 신의로써 벗을 사귈 것⦁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을 것⦁살생유택(殺生有擇):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 것.-신라의 불교(新羅佛敎) 법흥왕 527년 이차돈 순교에 즈음해 528년 불교가 공인되었다. 문화 예술 정치에 이르기까지 호국불교의 주체성으로 국가를 중흥시켰다. 신라의 왕은 스스로 자신이 부처라는 왕즉불 사상에 결속돼 나라의 부흥을 이끌었다. 전불칠처(前佛七處) 가람을 수호하며 신라는 과거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라 섬겼다. 신라불교 거대한 맥으로 토속신앙 샤머니즘과 부딪치고 소통했다. 종교적 성찰로 중생을 교화하며 부처님 땅 불교문화를 주도해나갔다.-신라의 왕(新羅王) 신라 56명 역대 왕 중에 9왕이 전시돼있다. 시조왕 박혁거세거서간(재위 BC 57~AD 4): 나정(蘿井) 숲 사이에 하늘에서 내려온 말(馬) 울음소리를 듣고 육부촌 고허촌장 소벌공(최씨)이 가서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있어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출생의 비밀이 신비롭고 예사롭지 않아 임금으로 받들었다. 처음의 큰 알이 박 모양과 비슷해 성을 ‘박’이라했다. 석씨왕 시조 4대 석탈해이사금(재위 57~80): 알에서 태어난 62세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다파나국’ 왕비가 임신한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으니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다”하였다. 차마 그 알을 버리지 못한 왕비는 비단에 알과 보물을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시조왕 39년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자 해변에 살던 노파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열어보니 어린아이가 있었다. 데려다 길렀더니 키가 9척에 지혜와 기풍이 뛰어나고 정신이 훌륭했다. 삼국사기 석씨 성(姓) 유래는 이러하다. 상자 도착 시에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왔기에,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지었다. 그는 게으름을 모르고 고기잡이로 길러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감지한 어머니는 “골격과 관상이 빼어나니 학문에 종사하며 공명을 세우라”훈육했다.
지리(地理) 공부에도 밝은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좋은 터라고 여겼다. 꾀를 써서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신라 궁궐인 월성터가 되었다. 2000년도 초기 이근직교수 【삼국사기⦁삼국유사】원문 공부할 때 강의실을 웃음보로 터뜨린 일화가 스쳐 피식 웃는다. “신라역사 기록상 남의 땅을 빼앗은 최초의 땅 사기꾼...” 해학을 가미한 꾸밈없는 인간미와 그 누구도 넘지 못하는 신라사(新羅史) 열강으로 매료당하던 고인이 된 이근직박사 불쑥불쑥 그립다. 김씨왕 시조 제 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2~284): 닭울음소리 새벽을 깨우던 계림의 금궤에서 탄생한 김알지 후손이다.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키운 알지의 계보는 이러하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았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다. 12대왕 석첨해니사금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다. 불교를 공인한 23대 법흥왕(재위 514~540). 영토를 확장한 24대 진흥왕. 태생은 성골이었으나 할아버지 25대 진지왕의 폐위로 골품제도 성골에서 밀려난 김춘추. 가야왕족 출신인 김유신 가문과 인연을 맺어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진골출신으로 처음 왕이 된 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이다.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했다. 660년 당군과 함께 백제를 함락했다.
삼국을 통일한 30대 문무왕(재위 661~681), 통일은 이룩했지만 동해구를 통해 왜군이 침입해오자 죽어서도 동해바다의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대왕암 수중릉에 장사지냈다.
31대 신문왕(재위 681~692), 부왕이 통일을 완성했기에 삭감된 국방비 예산을 교육비에 쏟았다. 신라 최초로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35대 경덕왕(재위 742~765), 성덕대왕신종, 불국사, 석굴사, 월정교 등 신라 으뜸의 건축물과 예술문화를 꽃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