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부(炭夫)들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투박한 발걸음도 조심스러웠으며 그분들의 근심까지 카메라에 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986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이후,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1세대 산업전사로 치열한 삶을 살아온 광부들의 땀과 눈물도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들 기억에서 잊혀져가는 탄광과 광부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며 한 우물을 파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병문(62) 씨다. 14년 간 삽이나 괭이 대신 카메라를 들었을 뿐, 광부들과 같은 장구를 갖추고 칠흑 같은 갱과 막장에서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온 박병문 작가는 강원도 태백에서 나고 광부의 아들로 성장했다. 작가의 사진작업은 7가지 주제로 ‘광부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는데 현재 6개의 작업은 발표되었고 마지막 작업의 마무리를 남겨 두고 있다. 광부들이 진폐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 것. 2014년부터 광부 프로젝트 7주제 중 ‘아버지는 광부였다’를 시작으로 2015년 ‘검은땅 우금(于今)에 서다’, 2016년 ‘아버지의 그늘’, 2017년 ‘선탄부-여자광부’, 2018년 ‘검은땅 막장 탄부들’, 2020년 ‘폐광’ 등의 전시를 선보이며 사진집을 연이어 발표했던 것. 이 탄광의 스토리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지만 한 때 우리 산업의 한 축이었던 광산산업에서 광부의 삽질이 끝나는 그 날까지 작가의 셔트 누르는 소리는 이어질 것으로 보였다. 이미 매스미디어에 다수 보도되었고 그를 주인공으로 소개한 프로그램도 많다. 그만큼 다큐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고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경주시 안강읍에 살고 있다. -탄광 다큐 사진가 박병문 씨, 시인 아내와 경주에서 살다...“경주에 살면서 색다른 해석 통해 의미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그의 아내 손정애 시인은 첫 시집을 냈다. ‘바람이 전하는 말(시산맥)’을 발간한 손정애 시인과 박병문 작가는 부부다. 이들은 손정애 시인이 살고 있던 안강읍에 살면서 광부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사진집에 실린 단상들은 그때마다의 현장 광부들과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는 것으로 아내가 윤문하는 식이다. 박 작가는 태백시 작업실과 안강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는 경기도 광주에서 위안부 할머니의 사진 봉사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2013년 첫 만남 이후 태백에서는 겨울철에 주로 작업을 하고 쉬는 시기에는 이곳 안강서 생활해오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 제 사진 작업에 아내가 글을 다듬어주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고요”   “경주는 태백과는 자연환경과 문화경관이 180도 다릅니다. 경주에서도 뭔가 기록 하나를 남기고 싶은 생각의 일환으로 한 마을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 중에 있습니다. 경주에 오래도록 살면서 색다른 해석을 통해 경주를 재조명해보려는 것인데 마을의 역사에 대한 인식들도 담으려 합니다. 연령별로 나눠 그들의 삶에 대한 기록과 함께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도 함께 구상해 다큐 사진으로 기획하려 합니다. 저와 경주의 작가 세 명이 함께 시도해 볼 작업인데요, 경주에 살면서 의미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박 작가는 황리단길에 있는 ‘황남정미소’에서 올 10월경, 아내 손정애 시인과의 시사전(詩寫展)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태백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시사전을 옮겨 올 예정인 것. 경주에서 부부전을 열려고도 시도 중인 그는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전주 등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전시를 가졌는데 경주에선 아직 전시를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경주에서 생활하는 다큐 작가로서 그의 전시가 무척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2014년부터 ‘광부 프로젝트(7주제)’를 구상하고 작업 이어가// ‘선탄부-여자광부’ 작업에선 늘 조연이었던 여자광부를 전면에 부각하기도 그는 1992년 축협직원으로 태백시에 첫 발령을 받는다. 사진을 취미로 하고 있을 즈음이었으니 그제서야 광산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그는 백두대간 31구간을 누비며 감성적 야생화 작가로 알려져 있었던 이다. 아버지의 검은 얼굴이 생각이 나면서 마침 석탄합리화사업으로 속속 폐광이 시작돼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몰입해서 촬영하기 시작한다. 2013년 ‘제1회 최민식 사진공모전 특별 대상’ 수상이라는 기쁨은 다큐 사진가로의 완전한 기폭제가 되었고 2014년부터는 구체적인 ‘광부 프로젝트(7주제)’를 구상하게 된다. 특히 ‘선탄부-여자광부’에 관한 사진은 늘 조연이었던 여자광부를 전면에 부각해 이들을 알린 것으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경우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선탄부-여자광부’는 강원도 여성가족부 공모에 당선돼 오는 8월 전시를 앞두고 있다. 이런 기록과 단상을 아내인 손정애 시인이 다듬어 주고 있다. 이런 중에도 다른 다큐 작업을 두 세 개 병행하고 있다. 포항시 죽장에 사는 위안부 할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7년째 기록하고 야생화 작업, 태백의 고랭지 배추에 관한 이야기도 7~8년째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물론, 선탄부 2, 폐광이후 재생되는 작업여정을 계속 예의주시하며 작업하는 일과 함께다. -저는 ‘인생 막장이 아니라 희망의 막장’이라고 항변합니다. “광부들이 일하는 막장은 엄청나게 더워요. 지하 100미터에서 1000미터까지 내려가면 사계절 상관없이 365일 지열이 장난 아닙니다. 거의 39~40도에 달하고 습도도 100%인 상황이지요. 산소는 희박하고 가만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죠” “사람들은 쉽게 인생 ‘막장’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오갈 데가 없을 때의 마지막 직업을 ‘막장’이라고 하는데 그분들은 생명을 걸고 들어가서 일을 하는 장소입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1986년부터 시행한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이후,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전국 367개 탄광업체 중 단 네 곳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세 곳이 강원도에, 한 곳이 전남 화순에서다. “검은 지하 막장에서 인생을 보낸 탄부 세월, 막막한 그분들의 앞날에 폐광보다 희망적인 날들이 펼쳐지고 대체 직업을 가져 가정의 버팀목으로 여전하게 역할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검은 진폐의 공포보다 더한 실직의 공포가 탄부들의 하루하루를 누르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니까요. 막장에서 깊이 파고 든 검은 분진을 씻을 때면 살아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흥겹고 즐거웠지만 지금은 생계가 끊어질 것 같은 위압감이 크다고 하시니까요. 분진도, 깊은 땅 속도 그들에겐 두려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질퍽하고 어두컴컴한 곳, 오로지 안전등 하나에 의지한 막장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었기에 어떤 힘겨움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탄광에서 부주의로 재해를 당하거나 사망하여도 책임이 없습니다’//“지속적 작업은 제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자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나라서 사진 작업할 때 생명 각서 쓰고 촬영하는 이는 저 밖에 없을걸요. 아버지가 탄광에서 평생 축전차 운전사로 일하셨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아버지가 시체를 수습해 광차로 끌고 나오셨습니다. 저도 도계 경동탄광 작업 마무리 단계에서 잠깐 하루 쉬는 동안 바로 이튿날 대형 폭발 사고가 나서 사상자가 10여 명이 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진들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환경 속에서 건져 올리는 사진들이다. “카메라 들고 촬영하면서는 모든 광부들이 저희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어떤 험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저는 무조건 공손하게 작업합니다. 작업 현장이 매우 열악한데 거미줄 같은 막장 안은 1미터 정도 밖에 되질 않아 운신하기조차 힘들어요. 근접 촬영은 상황 상 매우 위험해서 할 수 없고 광부들 뒤에서 그분들 작업에 방해 되지 않도록 렌즈로 조절해 촬영합니다. 암흑 속에서는 프레쉬를 터뜨리지 않고 초점만 맞출 수 있도록 최소한의 빛만 조절해 작업합니다” 박 작가는 예전, 촬영을 연속적으로 할 수 없는 등의 과도한 중압감으로 인한 불면과 스트레스로 치아가 모두 주저앉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저도 두렵죠. 그럼에도 계속적으로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은 사명감 때문입니다. 누가 제 작업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어요. 아버지의 자식된 도리로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으로, 후세에 남겨질 수 있는 하나의 아카이브로서 꼭 필요한 자료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박병문 다큐사진가를 취재한 후 광부들이 아직도 명맥을 이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박병문 다큐 사진가가 경주에 살고 있어 접할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오로지 사명감으로 일한다는 박병문 작가가 경주와 인연해 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언론 등 세간의 집중 조명을 받을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소통이 되고 있음을 느낄 때, 관람객들이 감동 받을 때 울컥합니다”라면서 연신 눈시울을 붉히는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진들은 사회적 약자에 바치는 헌사(獻辭)고 그들의 삶을 웅변하는 작업으로 보였다. 21세기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이런 일들을 하는 이가 있을까 싶을 만큼 탄광과 광부들의 이야기는 지금은 잊혀지고 다소 생경해졌지만, 진한 그들만의 삶의 이야기들이 박 작가의 피땀 어린 렌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났다. 광부를 담는 시선의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인간애가 짙게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한때는 좌절에 빠져 카메라를 놔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수차례의 전시에 어떤 지원도 한 번 받아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큐 사진작가로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그에게 작업 의지를 더욱 북돋울 전시 지원은 매우 절실해 보인다.   “4곳 남아있는 탄광이 2024년엔 모두 폐광됩니다. 매년 200~300명씩 인원이 감축되고 있죠. 폐광 이후도 계속 기록으로 남길 것이니만큼 제 작업은 더욱 영향력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기록들이 역사 교과서에 한 페이지라도 실린다면 바랄게 없겠죠” 그의 작업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가로는 최초로 장기적 시간성을 기록하는 일이라는 평을 얻는 이유다. 경주에서 함께 호흡하며 가끔씩이라도 그를 만나는 일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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