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누군가 당신 서랍을 뒤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가령 격의 없이 대하는 부하 직원이나 친한 상사가 허락도 없이 당신 물건을 만진다면 말이다. 기껏 스테이플러 좀 쓴 걸 가지고 뭘 그러냐 싶겠지만 당신은 분명 화가 치밀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했기 때문이다. 업무를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을 때 꼭 자신의 책상으로 불러들이는 상사도 있다. 한쪽 다리를 들어 영역 표시하는 개들보다는 세련되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 영역 구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책상을 중심으로 자신과 직급 낮은 상대를 나누는 영역 구분이다. 그러고 보니 “여보, 나 좀 봐요”하는 싸늘한 와이프 목소리는 꼭 안방에서 들러오더라. 문제는 보이지 않는 그 선(線)을 침범했을 때다. 넥타이 맨 짐승은 절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나 호랑이가 으르렁대지 않는 것처럼. 방심의 결과로 숨통을 물려버린 불쌍한 희생양만이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공허하게 말이다. 인간 사회나 〈동물의 왕국〉이나 선은 정확히 겹친다. 바로 각자의 고유한 영역과 그걸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선에 관한 법칙이라 서다. 간단히 말해 선을 넘지 마란 말이다. 그 반대도 있다. 이 선은 자꾸 넘어야 한다. 서로서로가 자꾸 이어야만 한다. 미국 어느 맥도널드 매장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란다. 흰 카디건을 곱게 입은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주문한 햄버거 쟁반을 들고 흑인 젊은이한테 다가간다. “이 자리 비었나요?” 주위엔 빈자리가 많았지만 힙합 모자를 쓴 젊은이는 흔쾌히 앉으시라 했다. 모르는 둘 사이에 선(線)이 이어지는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 그 선을 통해 젊은이는 자신의 여자 친구 이야기가, 할머니는 일요일마다 가는 교회 이야기가 오간다. 환한 웃음, 애정 어린 시선과 따듯해진 마음으로 선은 더욱 선명하고 튼튼해진다. 악수를 교환하고 헤어질 때 서로의 전화번호까지 교환한다. 그런 그들을 흥미롭게 쳐다본 또 다른 손님이 SNS에 사진과 함께 글을 올린다. 사진 밑에 공감과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퍼 나른다. 가게에서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공동체 테이블’이라고 이름 붙여줬다. 자꾸 넘나들어 더욱 건강해진 그 선을 기리기 위해.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더라면 이 해프닝은 아마 다른 식으로 해석되었을지 모른다. “징글징글한 코로나19는 보고 있나? 넌 우리 인간들을 자꾸 갈라놓으려 하지만 선으로 다양하게 연결된 우리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 세상에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 선도 있다. 강철보다도, 인장력(引張力)에서 강철보다 더 강한 거미줄보다도 말이다. 아, 질긴 거로는 고래 힘줄도 있는데, 아무튼. 이 선은 그런데 거미줄보다도 가늘다. 아예 눈에 안 보일 정도다. 보이지도 않는데 그 어떤 가위나 칼로도 끊을 수 없다. 그건 바로 원인과 결과 사이에 놓인 선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원인이 있으면 당연히 결과가 있는 법이다. 원인은 있는데 결과가 없을 순 없다. 시간차가 있을 뿐 원인은 반드시 결과로 이어진다. 초대형 컨테이너선(船) 한 대가 수에즈 운하에 좌초하는 바람에 국제 유가가 올랐다. 지중해 어느 배가 우리 동네 주유소에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걸 아주 효과적으로 정의한 용어가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다. 가령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니까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생긴다는 주장이다. 로맨틱하게까지 들리지만 매우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이다.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의 나비는 카오스 이론으로 발전한다. 이 둘 사이에도 역시 보이지 않은 선이 놓여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TV를 틀면 인과의 보이지 않는 선을 무시한 정치인 이야기뿐이다. 나쁜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한 원인을 만드는 데도 왜 하나같이 당당하며 또 보란 듯이 잘 사는 걸까? 화내지 말고 그저 지켜볼 일이다. 그 선이 얼마나 질기고 분명한지는 세월이 증명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괜히 화내지 말자. 또 새로운 선이 붙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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