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여러 번 맞싸웠던 적장 가토(加藤淸正)로부터 담판하자는 전갈이 왔다. 스님께서 몸에 작은 계도(戒刀)만을 지니고 적진에 드니 칼과 창을 든 군졸들이 에워싼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 자리에서 스님과 가토가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다. “귀국에 제일 값진 보물이 뭐요?”“아주 가까이 그 보물이 있소”“그게 뭐요?”“황금 천 근이 걸린 바로 당신의 머리요.” 이보다 훨씬 전 신라 때 박제상 또한 서산대사와 같은 기개를 가진 분이셨다.『삼국사기』 기록을 중심으로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눌지왕이 즉위한 후 왜국과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간 두 동생을 구해오려고 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이 일에 삽량주간(歃良州干)인 박제상을 추천했다. 왕이 그를 불러 간곡하게 청하니 기꺼이 명에 따라 먼저 고구려로 갔다. 고구려 왕을 설득하여 왕자인 복호와 함께 신라로 돌아왔다. 복호가 돌아오자 눌지왕이 기뻐하며 제상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처럼 생각하였는데, 이제 다만 한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이에 제상이 아뢰었다. “신이 비록 노둔한 재주이나마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사오니, 끝내 왕명을 더럽히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그 왕 또한 어진 임금인지라 제가 한마디 말로 깨닫게 할 수 있었사오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 깨우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거짓 계략을 써야 왕자님이 돌아오시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거든 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야기를 퍼뜨려서 저들로 하여금 그 소문을 듣게 하소서” 이내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 맹세하며 처자식도 만나보지 않고 율포(栗浦)에 이르러 배를 띄워 왜국으로 향하였다. 제상의 아내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포구에 이르렀다. 멀어지는 남편이 탄 배를 바라보며 크게 통곡하며 말하였다. “잘 다녀오십시오” 제상이 돌아보고 말했다. “나는 왕명을 받아서 적국에 들어가니 당신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하지 마시오” 제상은 곧바로 왜국으로 들어가 마치 본국을 배반하고 온 사람처럼 했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한편 백제 사람이 앞서 왜에 들어와 왜왕에게 참소하기를 “신라와 고구려가 왕의 나라를 침입하려 모의한다”고 하므로, 왜가 마침내 병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을 순찰하게 하였다. 때마침 고구려가 침입하고 아울러 왜의 순찰병을 잡아 죽이니, 왜왕은 곧 백제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집안사람들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제상이 정말 신라를 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왜는 군사를 내 장차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아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일행이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신라를 멸망시킨 다음에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식을 잡아 돌아오자’고 하였다. 제상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더불어 배를 타고 노닐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처럼 하였다. 왜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아무 생각도 없구나!’라고 생각하여 기뻐하였다. 이윽고 제상이 미사흔을 권해 몰래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제가 장군님 받들기를 아버지처럼 하는데 어찌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두 사람이 함께 출발했다가는 계획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작별하고는 신라를 향해 돌아갔다. 이튿날 제상은 뱃놀이로 피곤하다면서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왜인들은 미사흔이 도망한 것을 알고, 제상을 결박하였다. 그리고는 배를 달려 추격했으나 때마침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가 미치지 못하였다. 제상을 왜왕이 있는 곳에 되돌려 보내니, 왜왕은 그를 목도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시켜 장작불로 전신을 태운 다음에 칼로 베었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여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가족에게 후하게 상을 내렸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였다. 왕은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6부에 명해 멀리 나가 맞이하게 하고, 만나게 되자 손을 붙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를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즐기다가 왕이 몸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그 기쁜 뜻을 펴 보였으니, 오늘날 향악(鄕樂)의 우식곡(憂息曲)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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