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그것은 나의 것이지 내가 아니다.그런데 그것이 나로 행세한다.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제일의 물음은 바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변하지 않는 근원의 나, 본성에 대해 묻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에 다가가는 길이다. 묻고 또 물어보면 물음의 깊이만큼이나 삶이 깊어질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집에서 가장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나’라는 존재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잘 볼 수 없는 것 같다. 늘 보니까 자세히 보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으니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좀 거리를 두고 낯설게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라는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소크라테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이 금언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의 누구에게나 두루 삶의 본보기가 되는 귀중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혜가 신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무지를 아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는 이 격언을 자신의 철학적 활동의 출발점에 두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데서 행복과 지혜가 시작되고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데서 불행과 비극이 시작된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심오한 철학문제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의 기본은 자신의 ‘존엄’을 알고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사명’을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존엄’을 알고 산다는 것은 인생에 대해서 성실한 태도를 취하고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되는 대로 막 살아서는 안 된다. 방관자처럼 살아서도 곤란하다.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살아가려고 애써야 한다. 더 오래 건강하게, 인간답고 품격 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분수’를 알고 산다는 것은 자기에게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너의 몫, 너의 그릇을 알라는 것이다. 분수를 모르고, 분수를 어기고, 분수에 겨운 행동을 할 때 무리가 생기고 비극이 찾아온다. 자기의 밑천과 실력, 인생의 자본이 얼마만큼 되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자신을 알고 사는 것이다. ‘사명’을 알고 산다는 것은 제 구실을 바로 알고 사는 것을 말한다. 일생 동안 몸 바칠 수 있는 자기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행복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에다 인생을 거는가, 인생의 보람을 어디에서 찾으려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단 한번뿐인 인생을 산다. 남이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줄 수도 없다. 산다는 것은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제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자신에게 물어보자. 인생의 뜻을 재정립해 보자. 오늘이 인생의 첫날인 것처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맑은 하늘, 밝은 달 아래 날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부나비는 유독 촛불에 몸을 던진다. 이 세상에 부나비가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채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부나비 같이 명예와 이익을 쫓아 죽을 줄도 모르고 달려온 삶이다. 하지만 아등바등 해야 하는 젊은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는 ‘누구의 나’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 자유를 얻었다.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며 노년을 살아야 할 것 같다. 몸도 마음도 자유롭게 했으면 좋겠다. 다시 채근담의 이야기이다. ‘영욕에 놀라지 않으니 한가로이 뜰 앞에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고, 가고 머무는데 뜻이 없으니 무심히 하늘가 뭉치고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본다’ 욕심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만나자. 신의 이끌림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영성의 삶이다. 참된 나를 아는 것, ‘참나’의 본질은 사랑임을 깨닫자. 자신을 알고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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