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덕봉(德峯) 이진택(李鎭宅,1738~1805)은 조부 이윤석(李胤錫), 부친은 이운배(李雲培)·모친은 영양남씨 남국망(南國望)의 따님으로, 외동 방어리에서 태어났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의 「행장」에 의하면, “무오년(1738) 5월 21일 모친이 시조묘에 이르러 큰 알을 얻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는데, 용모가 넉넉하고, 행실이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다(英宗戊午五月二十一日母夫人夢 至始祖塚 得大卵而生公 狀䫉豐盈 儀度俊偉 自幼聰穎過人)”전한다. 어려서 남애(南厓) 이진원(李晉遠)에게 배웠고, 27세에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37세에 과거에 낙방하고, 안경점 등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유람기를 남겼으며, 55세에 봉화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거점으로 면암 이우(1739~1810)를 소수(疏首)로 43인이 연명하여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영조의 둘째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이선)의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 만인소에 참여해 중앙과 지방을 연계해 소사(疏事)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60세에 개성부 경력(經歷)으로 있으면서 문충동에 선조 익재공의 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었고, 말년에 안강읍 양월리에 있는 구강서원(龜岡書院)의 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표암에 시조 이알평의 유허비를 세우는 등 선대를 드러내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사헌부감찰·지평·장령 등 관직을 지내며, 마음 한편에는 장수(藏修)의 바람이 있었다. 1800년 63세 말년에 보문에서 불국사로 넘어가는 곳의 대덕산(大德山) 남쪽 끝자락에 소정(蘇亭)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마동(馬洞)에 덕봉정사(德峯精舍)를 지었는데, 이때 「소정거제신건상량문(蘇亭居第新建上樑文)」이 남아있다. 이후 덕봉정사는 1905년 지금의 산죽한옥마을 동쪽으로 이건됐다.
지자요수(智者樂水)·인자요산(仁者樂山)은 『논어』「옹야(雍也)」에 나오는 말로, “공자께서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동적이고 어진 자는 정적이며, 지혜로운 자는 낙천적이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는 기뻐하고 좋아함을 ‘요(樂)’라 하고, 동하여 막히지 않으므로 즐거워하며, 고요해 일정함이 있으므로 장수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자(程子)는 인과 지를 깊이 체득한 자가 아니면 형용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즉 어진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어 불변이므로 변동 없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항상 움직이므로 흐르는 물을 좋아한다는 뜻을 갖는다. 인자요산 지자요수 - 덕봉 이진택 나는 산수에 살며, 산에서 땔감 구하고 물에서 물고기 잡고, 산에서 나물 캐고 물을 마신다. 산을 가리켜 산이라 하되 인(仁)은 잘 모르겠고, 물을 가리켜 물이라 하되 지(智)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이에 긴 낚싯대를 던지고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부자(夫子)의 가르침을 외우고는 “어진 자는 어찌하여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어찌하여 물을 좋아하는가? 산은 산이거늘 어찌 어짊에서 취하였는가? 물은 물이거늘 어찌 지혜에서 취하였는가?”라 묻는다
아! 나는 알 것 같다. 인은 고요하고, 산 역시 고요하다. 지는 동(動)하고, 물 역시 동한다. 중후하여 옮길 수 없어 인자(仁者)의 기상을 엿볼 만하고, 두루 막힘이 없어 지자(智者)의 통달함을 생각할 만하다. 팔괘의 중간(重艮)은 산이 되고 생각은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인자의 일이 아니다. 습감(習坎)은 물이 되고 항상 거듭 가르침을 행하니, 지자의 일이 아니다. 이는 이른바 서로 마음이 맞아 합쳐진 것이다.
의리에 편안하기가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고, 사리에 통달하기가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오직 인이 산과 같기에 그 좋아함이 깊고, 오직 지가 물과 같기에 좋아함이 지극하다. 고요하고 늘 그렇기에 인자는 산이요, 산 또한 인인 것이다. 동하고 막힘이 없기에 지자는 물이요, 물 역시 지인 것이다. 깊은 산에 거하며 그윽한 덕이 요임금에게 들린 것은 대순(大舜)의 인이요, 구하(九河)를 틔워 흐르게 하고 농사일을 행하게 한 것은 대우(大禹)의 지이다. 태산에 오르는 부자의 인은 태산의 중함과 같고, 냇가에 있는 부자의 지는 물의 흐름과 같다. 이지러지고 무너지지도 않음은 남산의 수(壽)와 같고, 인자가 이것을 좋아하고 오래 산(壽)다. 물을 바라보는 법칙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보고, 지자가 이것을 즐기고 즐거워(樂)한다. 다만 푸르른 산만 알고 산이 산되는 이유를 모른다면 어찌 인자의 좋아하는 바를 알겠으며, 끝없이 넓은 물만 알고 물이 물되는 이유를 모른다면 어찌 지자의 좋아하는 바를 알겠는가?
때문에 중후한 것이 산이 되고, 인자가 그것을 바라보고 인이라 하며 좋아한다. 두루 흐르는 것이 물이 되고, 지자가 그것을 바라보고 지라 하며 좋아한다. 형체가 없는 것이 형체가 있는 것과 같고, 각각 그 이치를 따라서 그것을 좋아한다. 산에서 노닐며 인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인자요산(仁者樂山)이 아니고, 유람하는 자가 좋아할 바이다. 물을 바라보며 지가 있는 곳을 모른다면 지자요수(智者樂水)가 아니고, 완상하는 자가 좋아할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