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원사지에는 북서쪽에 1기의 부도가 있고 북동쪽에 3기의 부도가 있다. 북서의 부도는 용당을 지나 200여m 지점에 있는데 계곡으로 난 길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았으나 다행히 컴퓨터로 출력하여 코팅을 한 표지판을 걸어 두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북동의 부도는 절터의 북동쪽이라고 해서 동탑의 옆 좁은 산길을 무작정 찾아가는데 도중에 길 왼편으로 밭이 있고 산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망을 치면서 길까지 막았다. 그 망을 헤치고 계속 나아가는데 같이 갔던 아내가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졌으나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한참을 헤메는데 산비탈에 가건물이 보이고 그 옆으로 3기의 부도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절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가면 운동기구가 있는 광장이 있는데 계속 계곡을 따라 400여m를 더 올라가면 북동의 부도에 이르게 된다.
먼저 찾은 북서의 부도는 석종형으로 화려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사각 지대석 위에 3중의 사각 대석(臺石)이 있는데 맨 아래 대석에는 상단에 안상(眼象)과 유사한 문양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대석에는 각 면마다 4개의 꽃송이와 그 사이에 3자의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맨 위의 대석은 낮고 조각의 흔적은 보이나 마모가 심하여 식별이 되지 않는다. 3단의 대석 위로는 각각 앙련과 복련이 조각된 상대석과 하대석이 있는데 중대석은 멸실되었는지 없다. 몸돌은 종 모양인데 하대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종의 꼭지 형상이 모각되어 있다.
북동의 부도는 모두 3기인데 역시 석종형이다. 맨 오른쪽 부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을 조각한 상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렸는데 상대석에 비해 하대석이 빈약하다. 몸돌 하대에는 돌대를 마련하고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고 목 부분에도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굵고 가는 형태의 테두리를 둘렀다. 상륜은 보주형이다. 이 오른쪽 부도의 몸돌은 북서쪽의 부도와 유사하다.
가운데 부도는 각형의 지대석 위에 앙련이 조각된 상대석을 놓고 그 위에 몸돌을 올렸는데 상륜부가 확인되지 않는데 별도로 만들어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3기의 부도 중 가장 소박한 형태이다.
왼쪽 부도는 자연석 암반 위를 둥글게 깎아 하대석을 삼고 그 위에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을 놓고 별다른 조식이 없는 몸돌을 올렸는데 상륜부는 오른쪽 부도와 유사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안혜 등 4분 큰 스님 유골을 모두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고 했으나 이곳 원사지의 부도는 통일신라 당시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복발형 부도는 고려시대 말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도의 형식이 되었다. 따라서 이 부도들은 고려 말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원원사의 동쪽 봉우리에 4분 스님의 유골을 묻었기에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4분 스님의 유골을 안치했다면 이곳 북동쪽 부도는 4기여야 하는데 현재 3기뿐이다. 그리고 사령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없고 이 위치에 있는 산은 봉서산(鳳棲山)이다.
4분 스님의 유골을 모셔둔 부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봉서산을 올랐다. 봉서산이라는 산 이름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봉황이 깃든 산이다. 봉황이라는 새는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드는 것으로 알려진 전설 속의 새이다.
북동쪽 3기의 부도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우거진 왕대밭을 지나니 조릿대밭이다. 혹 봉황이 서식할 오동나무가 있을까 이리저리 살피면서 1시간 30여분 정상에 이르기까지 한 그루도 찾을 수 없었다. 4분의 스님과 관련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봉서산 정상은 고도가 571m이고 정상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면 입실,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삼태봉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