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고 엮고 뒤집는다’는 의미의 번(飜)과 ‘기와’의 와(瓦)를 써서 기와를 이는 장인을 뜻하는 번와장. 이 분야 최고의 장인이 우리 지역 안강에 살고 있다. 70여 년간 전통건축 현장을 누빈 최고령 현역 와공(瓦工) 이진도(85)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87년 번와 와공 925호로 문화재수리 기능보유자이기도 한 선생은 66년간 연마한 기와 이는 기술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전통건축의 현장에서 아직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구현해내고 있다. 한평생 기와와 함께 한 선생은 문화재수리기능자로서 주로 기와를 해체, 보수하거나 제작하는 일을 해왔다. 전통 건축의 정수를 잇는 일 중에서도 기와를 이는 번와장으로서 선생은 그 업적과 수많은 작업에 비해서는 유명세가 덜한 와공이었지만 이 시대 진정한 고수였다. 선생의 손을 유심히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난히 크고 억센 손을 가졌고 기골 또한 장대한 편이었다. 전통건축물 시공의 다양한 분야에도 능통한 선생은 지붕재료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기와를 잇는 번와 와공으로서의 전국적인 명성이 자자하다. 기와를 어떻게 잇느냐에 따라 목재가 대부분인 한옥에서 집의 수명을 결정하는 기능적인 역할은 물론 지붕의 곡과 전체적인 비례에서 지붕이 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선생만한 대가는 보기 드물다. 봄비가 차분하게 내리던 지난 12일, 안강읍 산대리 자택에서 선생을 만나 기와공장 일과 전통건축 번와 일을 하며 살아온 평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았다. 선생은 85세 고령임에도 혈기왕성해 보였고 최근까지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며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 년 동안 집에 못 올 때도 많았어요. 기와일 하느라. 추석에나 한 번 올까 뭐..., 하하. 선생을 찾던 그날도 안강읍 기계리 사가(私家) 일을 마치고 온 직후였다. 올 한 해도 많은 번와 작업들이 선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했다. 기와를 이는 것은 오랜 경험과 함께 한옥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는 번와 와공에 의해 이뤄지게 된다. 선생은 “지붕 기와공사가 부실하면 다른 공사를 아무리 잘해도 건물이 상하므로 기와를 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답니다. 견고하게 기와를 이는 것은 그 집이 오래도록 구조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한다. 이진도 번와장의 손을 거친 전통건축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공사한 내역과 기록 등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 일에 집중하다보니 작업에 대한 기록 관리나 자료 보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선생은 ‘경주유교문화유적(경주향교, 2010)’에 실린 전통건축물 대부분의 일을 해냈다고 한다. “이 책에 나온 건축물 중 옥산서원, 장산서원, 덕산서사, 삼괴정, 취담재, 영모정, 한강재, 직천서원, 호계서원, 덕산서사, 표충각 등 제가 한 작업이 대부분입니다. 불국사 극락전, 경주향교, 강화향교, 영천향교, 용산서원의 일부, 사찰, 서원 등의 개보수 공사도 많이 했습니다. 장산서원의 담장과 지붕기와 작업을 내 손으로 다 했습니다. 기와 한 장도 딴 사람에게 안 맡겼어요.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건물 담장 공사와 기와일 전부도요. 양동마을 내에도 상당 부분의 일을 담당했고요. 어려운 공사였던 초가지붕의 이엉을 엮는 일도 했습니다. 기와에 관한 일은 다 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생은 맞배지붕, 가적지붕, 다각지붕, 괄모지붕, 팔작지붕, 눈썹지붕, 구(口)자집 지붕 등 여러 지붕의 일을 두루 섭렵했다. -“열아홉 살에 이 일을 시작했으니 66년 간 이 일을 해왔습니다. 세월이 언제 가버렸는지 바쁜 것도 몰랐고 아픈 것도 몰랐어요” “지정문화재 일은 물론이고 사가의 일을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일이 너무 밀리고 바빠 여타 자격증 심사에 응할 시간적 여력이 없었어요. 틈이 나질 않았지요” 이는 화려한 경력에 비해 선생을 수식하는 명칭이 단출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선생의 업적에 아무나 필적하기 어려운 것은 장인으로서의 완벽함과 성실함에 근거한다. “일에만 집중하다보니 여타 공훈을 드러내는 일처리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언제 가버렸는지 바쁜 것도 몰랐고 아픈 것도 몰랐어요. 밤새도록 여러 일에 관한 연구나 고심을 하다 보니 새벽까지 뒤척일 때가 많았고 아침 되면 또 일을 가는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를 대상으로 방송 촬영도 해갔는데 그 방송 한 번 챙겨 볼 시간도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이 일을 하던 처음에는 모르는 게 많아서 실수를 참 많이 했어요. 안배우고 저절로 알아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고 이제는 저를 따르는 후계자, 후배들이 많습니다. 후계자들도 일을 꼼꼼하게 하고 칭찬받아서 제가 기분 좋아요. 저의 지나온 경험치를 책으로 한 권 정리하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이 일을 시작한 것은 포항에서 기와 제작하는 ‘황씨’ 라는 분의 기와공장에서였습니다. 그 기와 공장에 자주 가서 흙 만지는 걸 좋아했어요. 시골에 있어봐야 뾰족한 일도 없겠다 싶어 이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고요. 당시, 옥산저수지 쪽에 기와 제작공장이 있었는데 기와를 만드는 일부터 한 눈에 알게 돼 따로 배울게 없더라고요. 그대로 하루에 혼자서 400장씩 만들었습니다. 숙련공도 400장은 힘들다고 하는데 말이죠. 다시 황씨가 소개해 추풍령으로 옮겨 양와를 배웠고 한와 주문이 들어와 기왓장만 보고는 기와틀을 만들어 직접 만들어보았지요” 눈대중으로만 봤던 기와장과 똑 같이 나왔다고 하니 예사 눈썰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성주시 백진면 기와공장으로 추천돼 2년 정도 일하면서는 기와 만드는 전체의 공정을 완전히 숙지할 만큼 선생의 재능은 탁월했다. 수년씩 해야 하는 일들을 단숨에 익혀 버린 것이다. 기와 굽는 마지막 과정까지 숙지하게 된 선생은 이후 기와를 이게 된다. 기와를 굽고 나서 기와를 이는 기술이 최고의 과정이라고 한다. 처음 기와를 이게 된 것은 스물한 살 때였다. 성주 백진면의 사가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수년씩 걸리는 일이었지만 ‘손으로 하는 일은 배울 필요가 없었다’고 할 만큼 타고난 손재주였다고 한다. “숙련공도 3일 걸리는 일을 이틀 만에 해버렸죠. 초보자였고 배우지도 않았고 기와 이은 것을 보기만 했는데 말이죠. 몸을 아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향에서, 다시 대구와 경산의 기와공장으로 옮겨 기와를 이기 시작한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말구루마(선생의 표현)’에 기와를 실어 옮겼어요. 초가와 함석지붕을 벗기고 기와를 이게 됐는데 하루에 네 채씩 기와 이는 일을 혼자서 해냈습니다. 1970년대 경산의 기와공장서는 초가지붕을 거의 다 벗기고 기와지붕으로 교체하는 일의 대부분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후 다시 귀향해서는 기와를 굽고 기와를 이는 기와공장을 차렸는데 사라호 태풍으로 건물이 휩쓸려 참담한 실패를 겪는다. 이후 고향 안강으로 돌아와 기와공장을 차렸으나 다시 실패하고 영천에서도 차렸으나 또 한 번 실패를 경험한다. 토기와를 굽는 공장은 그에게 세 번씩이나 실패를 안긴다.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기와 이는 일은 계속되었다. 이후 시멘트기와와 블록이 새롭게 출시돼 산대4리에서 공장을 운영하다가 다시 문을 닫게 된다. “기와 공장을 네 번 실패하고 나니 어지간합디다. 그러는 와중에도 와공으로 살았지요. 그나마 그 기술로 살림을 꾸렸지요”  -“이 일이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단, 지붕에서 세 번 정도 떨어진 적은 있었어요” “공사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일하면 즐겁고 마치고나면 뿌듯하고 기분 좋았어요.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단, 지붕에서 세 번 정도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옥산 사가에서 약 4미터 정도 되는 제법 높은 지붕에서 미끄러워 떨어졌으나 다행히 바로 착지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떨어진 그를 찾고 있었는데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아픈 것도 내색 않고 다시 원위치로 사다리를 타고 후다닥 올라가 일했다고 했다. 다음엔 경산 남천면에서 추락했는데 역시 작업을 이어가 동네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안동 임하댐 수몰지역 공사할 때였는데 일 년 동안 집도 못 올 정도로 바쁠 때였지요. 역시 높아서 조심했는데도 떨어졌지만 또 착지를 잘해 똑바로 서 있었지요. 사람들이 놀라 뛰어와서 병원 가자고 했지만 갈일이 없었지요. 하하” 타고난 운동 신경에 강건한 체력이 뒷받침 됐던 까닭이었다. 이는 선생이 평소에도 달리기 등으로 체력을 단련한 결과였다고 한다. -“작업할 때 일을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치지 않고 일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으로 열심히 일해 왔으니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사시작부터 마무리 될 때까지 사고 없이 마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또 아침부터 저녁 퇴근까지 일하는 사람끼리 다투지 않도록 합니다. 건축주와의 관계에서도 배려해주는 말 한마디 들으면 기분 좋게 일하거든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도 차별을 두지 않고 일하려고 합니다. 좋은 말로 타이르고 이끌어 줍니다. 큰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일에서도, 베테랑으로서의 삶에서도 선생만의 자족적인 여유가 느껴진다. “기술로서 기와를 한 채 완공하려면 설계와 도면이 있어도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매(경사)가 져야 빗물이 잘 빠지는데 기와 자체가 경사가 너무 급하면 훑어져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이 그 예입니다. 시공할 때 최대한 흘러내리지 않도록 방책을 하지만 결국 1~2년 내로 와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항상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걱정스럽지요. 건축은 항상 살아있으니까요. 정말 큰 스트레스입니다. 건축주가 원하는 대로 시공은 하지만 사후 안전 등을 고려한 설계와 시공이 필요합니다. 오랜 경험이 있는 와공들은 알고 있는 일인데 양심적으로 일하려고 하니 고민이 따른다는 거지요. 결국 기와 물매의 경사는 너무 심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설계 시 이런 점을 고려해주어야 합니다” “올 한해도 직천서사 담장 공사, 왜관 사찰 공사 등의 크고 작은 일들이 예정돼 있고 지금까지 일을 찾아다닌 적 없이 주문이 밀려있어 자잘한 일들은 후계자나 관계자들에게 미뤄주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변함없이 있어주면 늘 흐뭇하지요. 주변 경관과 함께 그 집의 유래가 어우러진 건축물은 정말 아름답지요. 그래서 기와 일이 더욱 즐겁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번와장 이진도 선생이 오늘도 건재하다. 진정한 장인 정신으로 일생을 기와를 만들고 이는 일에 전념한 선생의 삶의 태도는 경박한 직업관을 가진 우리에게 사표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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