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보문리 명활산에 세거한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은 우암 남구명의 손자로 1756년 생원시에 합격 후 학문의 입지를 다졌고, 이계 홍양호·화계 류의건·대산 이상정·해좌 정범조 등과 교유하였으며, 가문과 지역의 명성을 모두 얻은 인물이다. 슬하에 남경채(南景采)·남경희(南景羲)·남경화(南景和) 등 3남 1녀를 두었고, 1771년 보문촌 덕계(德谿)의 동쪽에 초봉암(招鳳庵)을 짓고 처자식과 함께 학문을 닦으며 생활하였다. 동봉(桐鳳)이 머물고, 덕봉(德鳳)이 바라보이는 곳에 상서롭고 고귀한 봉황의 빛나는 아홉 깃털의 기이한 자태를 얻어 봉황과 함께 노닐 것을 희망한 남용만은 초대해도 오지 않는 봉황의 조우를 기대하며 봉황을 부르는 공간을 초봉암(招鳳庵)이라 정하고, 동쪽 행랑을 남휘정(覽輝亭)이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명활산(明活山)은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고 전한다. 명활산은 신라의 수도방어 역할을 담당한 명활산성과 남쪽의 낭산(狼山) 일대는 옛 신라 고야촌(습비부) 6부 촌장 가운데 설거백(薛居伯) 경주설씨의 전설이 서린 좋은 터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산은 길위(吉位)에서 오는 것이 좋고, 물은 흉방(凶方)으로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명활산의 입지가 바로 그러하다. 그리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산세에 두루 산맥이 이어지면서 물로 인한 피해가 적은 길지의 명활산 터에 자리한 남용만은 산림처사적 삶을 살았고, 아들 치암 남경희 역시 지연정(止淵亭)을 경영하였다. 아들 남경희가 편집한 「활산선생어록」 가운데 회재와 퇴계를 언급하면서 “회재는 사람을 다스리는 치인(治人:經濟)을, 퇴계는 도학(주자학)을 자임하였고, 회재는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성현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어찌 따르는 제자가 적다고 의심하겠는가? 그리고 『주자서』를 읽고자 한다면 마땅히 『퇴계집』을 읽어야 한다”며 학문의 방법을 설명하였다.활산설(活山說) - 남용만 계림부의 진산(鎭山) 명활산(明活山) 이름이 갖는 의미를 궁구할 수 없다. 어떤 자는 산맥이 토함산으로 나와 그 높고 낮음의 형세가 원기(元氣)가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용과 호랑이 같다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지리를 공부하는 자는 사면을 두르고 그곳에서 융합되어 결합된 것은 두루 나쁜 기운이 부딪혀 들어오는 충살(衝殺)이 없고, 저절로 생방(生方:물이 있는 곳)하여 물을 얻었기에 활(活)이라 하였으니, 두 가지 설 모두 천착되고 징험할만한 것이 못 된다. 어떤 무하옹(無何翁)이 그 아래에서 집을 빌려 살았는데, 사람됨이 매우 졸렬하여 스스로 살아갈 형편이 못되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모두 세상이 맞지 않고 우활(迂活)하였고, 자칭 ‘활산노인’이라 하였다. 노인은 “때로는 형(形)으로 분명하니, 대개 산은 저절로 활기(活氣)가 있다.”라 하고, 지리를 공부하는 자는 “수(數)를 보면, 대개 산은 좋은 위치[吉位]에서 활(活)을 받는다.”라 말하니, 무릇 내가 자칭하는 이유이다. 대개 나의 생활은 산에 바탕한다. 산의 땔감은 나의 온돌을 따뜻하게 하고, 산의 나물은 나의 반찬거리를 돕고, 산등성이의 뒤쪽엔 큰 하천이 흐르는데 끌어다 물을 대면 나의 논과 밭이 물을 댈 수 있으니, 이 세 가지 이로움은 늙은 나를 도와 생활하게 하고, 아마도 늙은 내가 죽지 않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활산의 이름으로 인하여 스스로 ‘활산’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릇 이산에 의지해 사는 자라면 이러한 이로움이 없을 수가 없으니, 어찌 유독 혼자만의 산이겠는가? 무릇 자식과 함께 사는 자가 5·60가구나 되니, 그대만이 어찌 오로지 취하여 이름하겠는가?”라 하면, 노인은 “나무하고, 나물 캐고, 농사짓는 것은 다른 산에서도 마찬가지요, ‘활산’의 이름이 유독 이곳에 있으니, 내가 처음으로 이름한 것은 아니다”라 하였다. 산은 마을의 큰 길가에 있으며, 벌거벗은 민둥산이다. 풀 줄기는 작고 쪼개져 땔감하는 자들이 내버려 두고, 쓸모없는 쑥과 개자리풀은 풍족하게 사는 자들이 천하게 여긴다. 노인은 장차 이곳을 이롭게 하여 겨울철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산은 노인으로 하여금 살게 하였으니 진실로 고맙다. 하물며 산의 아름다운 꽃은 노인의 시 짓는 재료가 되고, 산의 기이한 새들은 노인이 술병을 들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생활할 뿐만 아니라 또 즐거워하였으니, 산은 생활하는 노인을 만나 그 이름을 얻었고, 노인은 활산에 살면서 그 이름을 정하였으니, 그 역시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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