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정치                                     고영민 봄이 오는 걸 보면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생각이 든다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얼음이 풀린다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떨지도 않고 걷는다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따뜻한 눈송이들지난 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하늘을 올려다본다단단히 감고 있던 꽃눈을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나의 딸들은새 학기를 맞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노래 “방금 봄이 오는 들판을 산책하고 왔어요. 봄처녀도 보았소.” 얼마 전 선배가 카톡으로 보내온 소식이다. 봄처녀를 보았다니, 새싹도 돋아나고, 꽃망울도 제법 터뜨리고, 구름도 제법 한가해졌구나. 꽃샘추위가 몇 번 왔다가겠지만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우리 가슴 속에 찾아와 볼을 부비리라. 일 년에 한 계절, 봄이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맙고 설레는 일이다. 어느 시인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지뢰가 폭발하듯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이 터진다고 했다. 봄꽃 소식이 북상하는 속도는 하루에 22km. 제주도에 개나리 피면 정확히 20일 후에 정확히 서울에서 핀다고 한다. 22km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쉬지도 자지도 않고 하루에 걷는 거리라니 신기하지 않은가? 시인은 봄을 세상이 나아지는 계절이라 나직이 말한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진다. 얼음이 풀리고, 날이 따뜻해지고, 밖으로 나가고 싶고, 꽃이 눈시울을 뜨고, 이제 바람도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 눈송이마저 따뜻하다. 고라니가 찬 시냇물에 입을 맞춘다. 지난 겨울 고비를 넘긴 노인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봄의 노인이 된다. 내 딸들은 신나게도 부푼 새 학기를 맞는다. 얼마나 생기 있고 멋진 봄날의 일상인가? 그러나 그것만일까? 고영민의 시에는 현상을 담담하게 서술한 문장들 이면에 적막과 우울이 스며 있다. 별 의미를 갖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는 발화들이 내밀하게 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문장은 그렇게 다른 의미를 실어 나르는 매개가 된다. 그것은 우선 아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상과의 대비에서 온다. 봄은 왔건만 내집 마련의 길은 멀고 생계는 더욱 팍팍해지고, 실업의 나날은 지속된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건 미혼(未婚), 비혼(非婚)족들. 꽃은 피었는데 골목엔 어린 아이의 웃음소리 들리지 않고, 좋은 시절은 왔지만 아직도 우리네 상황은 겨울[춘래불사춘]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시인은 그래서 제목을 봄의 ‘정치’라 했구나. 봄은 이런 정치로 세상을 싱그럽게 만드는데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우리 정치도 세상을 나아지게 만들었으면, “몸을 움츠리지 않고/떨지도 않고/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게 만들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블랙 유머도 들어 있구나. 그래서 시인은 정치가 봄보다 못하다는 직설을 하는 대신 ‘봄의 정치’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구나! 그래, 정치야 봄에게 조금은 미안해야 된다. 암, 그래야 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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