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 초월산대숭복사비명,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한다. 이 사산비명은 모두 최치원이 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 초월산대숭복사비를 제외한 3비는 고승들의 행적 위주의 비문인데 비해 이 비는 숭복사 창건과 관련된 내용으로 차이가 있다. 또 나머지 3곳의 비는 현존하는데 이곳 숭복사비는 일찍이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하지 않으며, 비석을 받쳤던 쌍귀부와 비편만 몇 조각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비문은 필사본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비석의 받침인 쌍귀부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며 그동안 수습된 15편의 비편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와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비편의 글자 일부를 『삼국유사』 내용과 대조한 결과 이 절터가 곡사(鵠寺)로, 헌강왕 때에 숭복사로 개칭된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추어, 최치원이 짓고 글씨를 쓴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의 비문을 집자하여 비신에 새겼다. 또한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쌍귀부를 복제하고 없어진 이수를 고증하여 이 비를 복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곡사를 경문왕 때 크게 중수하여 원성왕릉을 지키며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헌강왕 11년(885)에는 숭복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듬해 최치원에게 이 비의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은 헌강왕과 정강왕이 연이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오랫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10년(896)에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절터가 숭복사지라는 것은 바로 최치원이 지은 비문의 파편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졌는데 그 기록에 의하여 당시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절터에 왕릉을 쓴 내력 등을 알 수 있었다. 숭복사지는 1931년 일본인 스기야마(杉山)에 의해 알려진 후 1939년에 비편들이 일부 발굴되어 이곳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곡사를 옮긴 곳이며,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것 등이 밝혀져 숭복사지로 확인된 것이다. 현지에 있는 비의 안내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숭복사비는 진성여왕 10년에 세웠으며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인 소문왕후의 외삼촌이며, 원성왕비인 숙정왕후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이 창건한 곡사에서 기원하였다. 그 뒤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지금의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세웠다. 뒤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했다. 헌강왕 11년에 절 이름을 곡사에서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 해에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성여왕 10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또 이 비문에는 최치원의 아버지인 최견일(崔肩逸)이 숭복사 중건에 관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최치원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사찰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열전」에 친형인 승려 현준(賢俊)이 해인사에 주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최치원 자신도 말년에 해인사에 머물렀다. 최치원이 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산비명뿐만 아니라 『법장화상전』 · 『부석존자전』 · 『석순응전』 · 『석이정전』 등 고승과 관련한 저술을 남기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할 때 화엄종장(華嚴宗匠)인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과 교류를 한 사실, 그리고 이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불교에도 깊이 심취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숭복사지를 나서는데 바람이 무척 차다. 하늘에 낮게 드리운 구름에다 나라가 돌아가는 모양새, 코로나19 등으로 몸과 마음이 잔뜩 옴츠려 든다. 중국 선(禪)의 황금시대를 장식한 황벽(黃蘗)선사는 이렇게 노래했다.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뼛속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어찌 매화 향기 코끝 찌름을 얻겠는가. 다가올 새봄에는 우리 모두 매화 향기에 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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