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면 영화 ‘철도원’이 떠오른다. 맑은 얼굴빛엔 타협이 깃들 여지가 없어 뵈고 고지식할 정도로 원리원칙에 철저하고 성실한 철도종사자였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바로 한국철도공사 대구본부 경주역 허남태(60) 역장이 그렇다. 33년 간 철도원으로 우직하게 일하다 정년을 채운 그는 이제 정들었던 경주역 역장의 자리를 떠난다. 1988년 8월 철도공무원 공채로 울산 호계역 역무원으로 첫 발을 내디었으니 올해로 33년째 근무다. 현역 근무로는 며칠 남겨두지 않은 지난 28일, 경주역 역장실에서 허 역장을 만났다. 그날 아침 직원들이 허 역장을 환송하는 작은 이벤트를 열어 감동적이었다면서 “울컥했죠. 너무 곧이곧대로 원리원칙만 따지고 인정머리없게 대한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해주니 감사하지요”라며 첫 일성을 뗀다. 그는 철도종사자로 지금까지 굳건하게 일해 오면서도 구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철도인으로서 충실하게 복무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교대근무를 하면서도 대학교와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을 더욱 공고하게 완성했을 뿐 아니라 17년간 지속돼 온 다양한 봉사활동과 1987년부터 시작한 56회의 헌혈로 여러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삶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이 여러 대목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를 대부분 철도와 함께 보낸 그에게선 한 직종에 오래도록 종사한 이들에게서 풍기는 전문성의 향기가 진했다. 2012년 당시 경주역 부역장이었던 그는 본지 경주 간이역 기획연재에서 바쁜 공무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간을 쪼개어 자문을 허락해준 인연이 깊은 이기도 하다. -38세 불국사 부역장으로 취임...초고속 승진//역무원으로 출발해 수송원, 승무원, 부역장 고루 경험한 이력은 후일 역장이 되고서도 튼실한 거름 돼 1988년(28세) 사회 첫 발을 호계역 역무원으로 출발한 그는 1989년 경주역에서 수송원, 역무원, 열차승무원으로 근무한다. “당시만해도 공채 출신은 나아가야 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은 것도 이즈음 이었습니다. 처자식, 부모형제에게 자랑스럽고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죠. 5년 정도를 염두에 두고 도전한 부역장 시험은 경력과 직급을 갖춰야했지만 8급 시험을 통과해 그래도 공부를 시작했고 운 좋게도 계획을 앞당겨 3년 만에 합격했습니다. 부역장 시험 합격했을 때 특히 장인어른이 그렇게 자랑하시고 기뻐하셨어요” 합격하면서 직위가 오르고 승진으로 이어져 드디어 불국사 부역장으로 취임한다. 38세였다. 당시 남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초고속 승진이었다. 입사 한지 10년도 되지 않아 부역장이라는 타이틀을 따냈고 이는 그가 일찌감치 뜻을 세우고 준비했던 결과였다. 순수한 노력으로 이뤄 적재적소에 발령받은 것이었다. 가정 형편상 원하던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그는 포항 괴동역에서 근무하던 30대 초반, 중국어 교육을 받았던 것과 연계해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해 성적우수상까지 받을 정도로 향학열을 불태운다. 재학 시 2003년 경 봉사활동과도 인연이 시작돼 이후로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괴동역에서 봉사회를 조직해 목욕보조, 청소 등으로 봉사를 시작하다가 2007년 ‘나루터봉사회’를 조직하고부터는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하천과 산 정화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2010년 나이 50에 교대 근무를 하면서도 동국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습니다. 2012년에는 대학원 논문(‘서비스 질과 고객만족도가 고속철도 재이용의도에 미치는 영향’)을 통과하고 서경주역장 발령도 받아 제게는 기념비적 한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경주역 부역장, 서경주역 역장, 입실역 역장을 거쳐 2018년 경주역 역장으로 취임했다. 서경주역 역장 재직 시에는 심정지로 쓰러진 고객을 부역장이 심페소생술로 살려 낸 미담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경주 관내 역을 중요 역들을 두루 다니면서 역무원부터 시작해 23년간은 대표성을 지닌 위치에서 일해 온 것이다. 역무원으로 출발해 수송원, 승무원,부역장 등 고루 경험한 이력은 후일 역장이 되고서도 튼실한 거름이 되었고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허 역장은 성품이 워낙 강직해 대쪽 같기로 유명하다. 입실역 역장을 한 뒤에는 영천역, 포항역 팀장 등을 거치기도 했으나 꿋꿋하게 정도(正道)만을 걸어왔기에 2018년 다시 경주역장으로 돌아온다. 권위적인 ‘라인’ 타기를 극도로 경계하며 타협하지않고 일(업무)만 중시했던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런 저의 일련의 행보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다. 업무에만 충실하자는 제 소신을 굽히지 않았거든요” -에피소드...“모닥불 피워놓고 시체 지킨 적도 있었지요”// “콩잎 삭힌 것 싣고 타는 일도 많아 곤란한 적 한 두 번 아니었죠” “역무원 시절에는 험한 일을 많이 겪었죠. 호계역 첫 발령지에선 다음날 직무 인수할때까지 모닥불 피워놓고 시체를 지킨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술에 취해 객차에서 떨어진 사고였죠. 이런 비슷한 일들이 많았어요. 그런 반면, 경주역 역무원 시절엔 소매치기를 당한 손님에게 차표와 교통 여비까지 보태 준 적이 있는데 대형 책방에 근무했던 그분이 빌려간 돈도 보내주고 책도 몇 권 보내왔던 훈훈한 기억도 있습니다” “기차는 서민들에게 생계수단으로서의 교통 기능이 컸습니다. 새벽에 포항서 부산가는 첫차를 타면 일반 고객에게 미안할 정도로 농산물, 채소과일 등의 짐을 많이 실어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계절적으론 콩잎 삭힌 것을 싣고 타는 일이 많아 곤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코가 막힐 지경인데 고객들은 오죽했겠습니까. 하하. 그분들은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하는 생계 수단이니 함부로 말도 못했지요” -인원이 너무 초과돼 기차 아래쪽 스프링 부려지기도, 마이카 붐 불고서는 수송인원 완전히 격감 “마이카 붐이 불기전에는 아침에 통근, 통학하는 기차가 도착하면 플랫홈이 인파로 새까맸습니다. 1990년 초반만 하더라도 명절 경주역에는 기관차에서 양복입고 신문지 깔고 고향 갈 정도였지요. 요즘은 상상도 못할 풍경이죠. 그리고 제가 매표 볼 당시는 직원이 다섯 명 이었어요. 지금은 한 명이고 전산으로 처리하지만 당시에는 일일이 손으로 날짜를 찍어냈는데 시간대에 맞춰 수십 장, 수백 장씩 표를 미리 찍어놨어야 했어요. 대합실 안에서부터 꾸불꾸불 줄을 서서 역 바깥까지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죠. 주말에는 객차 연결을 증가해 수송했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 마이카 붐이 불고서는 주말에 더 줄어들어 오히려 객차연결을 줄였어요. 완전히 격감했죠. 어떤 때는 너무 인원이 많이 타서 기차 아래 스프링이 부려져 경주서 객차를 예비차로 바꾼 적도 있었어요. 요즘은 정원에 정확히 맞춰서 태우지만 그땐 그랬었죠. 그러다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크게 이용인원이 줄었습니다” -“경주 철도교통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시각이 아쉽습니다”//“경주역은 3만2000평 역사부지에 대한 지표조사만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신경주역은 울산경주포항 약 200백만 역세권을 겨냥해 유치했는데 신경주역의 위치와 입주조건 등의 원인으로 울산역, 포항역이 생겼고 그 기능이 분산돼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내년 동해선과 중앙선의 복선전철화가 완료돼 경주역이 폐쇄되고 현곡면 새 역이 개업하면 머지않아 포항 가는 ktx가 간간이 설 수 밖에 없고 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경주 철도교통의 백년대계를 보는 시각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불국사, 경주, 서경주 이 세 역의 기능을 신경주역이 흡수해야 하는데 사실은 거의 기존고객 3분의 2는 흡수하지 못할 것입니다. 현곡역도 서경주역처럼 많은 기능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항에서 영천, 동대구, 부전가는 열차만 이용할 수 있으니 잘못된 역사 위치지요. 경주를 거쳐 가는 많은 일반열차이용객들은 거의 흡수할 수 없으니까요” “경주역이 문을 닫게 되면 일제강점기 이후 지표 조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3만2000평 역사부지에 대한 지표조사만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발굴이 끝났다 하더라도 보존이냐 박물관으로 옮길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시간이 또 걸리는 거죠. 경주역 존립과 폐쇄의 문제는 간단치 않습니다” -역장 직위와 권위 내려놓고 33년 전 역무원으로 다시 돌아가 ‘봉사하렵니다’ 허 역장은 현역에선 물러나지만 재계약으로 신경주역에서 다시 2년간 일한다. “33년전으로 돌아가 직위없이 역무원으로 안내 업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책임질 직위가 없으니 홀가분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3년간 대표성을 지닌 자리에서 일해서인지 사실 어깨가 무거웠거든요. 정말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겁니다” “시원섭섭합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런 만큼 성과도 있었고 지금도 바쁘게 살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내년엔 농업대학서 귀촌귀농과정도 공부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봉사활동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요”라는 허 역장은 여전히 분주할 인생 제2막의 나날을 예고했다. 허 역장은 “후배들이 요즘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당하거나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승진에도 관심이 덜하고요. 조직과 자신의 발전에 좀 더 힘써 주면 좋겠습니다. 안타까워요. 자각하고 더욱 노력해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라면서 애정 어린 당부도 잊지 않았다. -허남태 역장은? 표창 및 상장 1991년 부산지방철도청장 표창(업무수행 우수), 1994년 부산지방철도청장 상장(친절봉사 사례발표), 1997년 철도청장 표창(무재해 목표달성), 2008년 공사사장 표창(20년 근속표창), 2013년 적십자 헌혈유공 은장, 2013년 자원봉사 유공 경주시장 표창, 2019년 적십자 헌혈유공 금장 수상.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