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                                                        정병근 텔레비전이 꺼졌다화면이 부르르 떨리더니 몇 번 번쩍거리다가한 점으로 작아지면서 소멸했다별빛이 사라지듯 이생의 빛을 거두었다적색거성처럼 화면은 며칠 전부터 불그스름했다옆구리와 가슴을 쿵쿵 치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텔레비전은 한 번 감은 눈을 더는 뜨지 않았다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켜도 허사였다오래 준비해 온 듯 텔레비전은 단호하고 고요했다결혼하면서부터 함께했으니 근 25년,나는 그렇게 텔레비전을 임종했다집안의 큰 어른이 돌아가신 듯 마음이 허망했다무릎을 세우고 텔레비전을 보던 고향 집 아버지 생각이 났다아, 무슨 말끝이었나그때 나는 아버지와 텔레비전을 겹친 시 한 편을 썼었다갑작스런 고요가 귀에 맴돌아 나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아내에게 알릴까…… 바쁘다고 짜증내겠지처사께서 졸卒하셨다고 부고를 띄울까…… 다들 웃겠지텔레비전은 우리 집의 어른이었다거실의 제일 상석에 앉아 세상의 영욕을 비추며 가뭇없는 우리의 눈을 지그시 모아주었다평평한 당구대의 알레고리를 간직한 채 평면으로 돌아가셨다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텔레비전의 주검을 방치한 채 몇 달을 보내는 동안우리는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뿔뿔이 눈을 돌렸다밥상은 고요했고 집 안은 푹 꺼진 동굴처럼 어둑했다나는 아내가 텔레비전을 들이자고 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아내도 나 같은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 어른의 죽음, 그 이후 정병근의 새 시집 『눈과 도끼』에 눈길이 오래 갔다. 중년에 이른 자신의 자화상 「나를 만났다」, 「보인다」같은 작품을 읽을 땐 애잔했다. 사무치는 이생을 개괄한 「아내가 운다」와 이 시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램프의 사내」를 읽으며 그의 부부가 떠올랐다. “광주리에 뙤약볕을 이고” 간(「엄마는 간다」), “한번도 고등어를 제대로 먹지 않”은 어머니(「고등어는 나의 것」 )를 읽으면 가계가 느껴진다. 전철역 출구 앞에서 “천지에 나 닮은 이, 수심에 가득 찬” 형님을 만나 “비탈방에 기거하며 경비 일 하는 사연을 들어보련다” 하는 「형님을 데리고」도 곡진하긴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를 읽으며 웃다가 슬퍼지다가 다시 심각해지기를 여러 번 했다. 쉽고도 잔잔하고도 여운이 오래 남는 시다. 시의 도입부를 읽으면 참 우스꽝스럽다. 화면이 떨리다가 꺼지는 장면을 “별빛이 사라지듯 이생을 거두었다”로 표현한 것도, 칼라가 분별되지 않는 상태를 적색거성으로 잡은 것도 그렇다. 그러나 “오래 준비해 온 듯 텔레비전은 단호하고 고요했다”에 이르면 텔레비전은 참 어른의 풍모마저 풍긴다. 그 어른이 사라지고 나니 집안은 “갑작스런 고요”로 인한 적막강산이다. 이 불길한 슬픔이라니! 이 시의 내밀한 부분은 “지그시”와 “뿔뿔이”라는 두 부사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지그시”는 ‘모아’라는 말을 당기고, “뿔뿔이”는 ‘돌린다’라는 말을 당긴다. 그렇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영욕을 비추며/가뭇없는 우리의 눈을 지그시 모아주었”는데, 휴대폰은 “작은 화면으로 뿔뿔이 눈을 돌”리게 하는구나. 그래서 “집 안은 푹 꺼진 동굴처럼 어둑”해지는구나. 가정에까지 들어와 가족마저 각자의 섬에 빠지게 하는 문명의 이기를 고장난 텔레비전을 통해 떠올리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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