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항공우주국(NASA) 발(發) 놀라운 뉴스가 있어 소개한다. 아주 오랫동안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라고 하여 우리에게는 외계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지구 밖 생명체를 연구해 왔던 미 항공우주국에서 드디어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나사 소속의 선임 연구원이며 교수인 실바노 P. 콜롬바노(Silvano P. Colombano)가 그 장본인인데, 그는 논문에서 덩치는 작지만 지능은 엄청나다(tiny super-intelligent)는 식으로 외계인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까지 지구를 다녀갔을 개연성을 언급했다. 뭐든(?) 의심하고 보는 우리로서는 ‘아, 외계인은 역시 존재하는구나’ 하고 더욱 확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논문이라면 기본적으로 단정적이고 주장이 명확할 텐데, 왜 외계인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거나, 탄소(Carbon)와 같은 인간의 신체 구성 물질로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언급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린 인간이지 외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은 우리가 인간임을 그저 환기했을 뿐이다. 항상 기준은 나고 우리 인간이니까,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어도 바로 옆을 지나가는 외계인은 못 봤을 거란 이야기다. 가까이 있어도 전혀 인지 못하는 이런 갭(gap) 문제는, 인간과 외계 생명체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사이에도 흔히 일어난다.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만 해도 그렇다. 가령 양 손에 짐을 들어 행동이 조심스럽고 느린 상황에서 백화점 출입문을 통과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의 경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세요”하고 상대방의 길을 터주고 나서 조심스레 내 갈 길을 간다. 먼저 가는 주체(주어)는 상대방이다. 반면에 미국 사람은 이럴 때 “after you”라고 한단다. 직역하자면 “너 다음에”라는 말인데 의역을 하자면 “너 다음이 나야”라고 나를 앞세운 말((me)after you)이란다. 주어는 나란 말이다. 행동은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똑같다. 차이는 행위 주체를 누굴 우선으로 두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는 “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지른다. 구원해야 할 인류의 대표격으로서 나란 말이다. 너무 과한 해석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문화권에서 살고 있다. 반면에 서구권에서는 “help me”라고 “날 살려내라”는 직접적인 명령 어법이다. 담마빠다(Dammapada: 법구경)라고 하는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관점을 이렇게 해석한다. ‘손에 상처가 없으면 독을 만져도 아무 탈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독이라도 상처가 없는 손에는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마음에 악(惡)한 기운이 전혀 없으면 악이 그를 침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대상화된 악의 원천적인 차단 내지 접근의 불허는 내 마음속 악한 마음의 부재에 달렸다는 불교 특유의 논리다.좁쌀처럼 새들이 좋아하는 모이를 한 움큼 쥔 손을 펴면 어디에 있었는지 새들이 하나 둘 손에 앉는다. 새들은 기가 막히게 잘 안다. 먹이를 주는 사람은 새들을 전혀 괴롭힐 의도가 없음을 말이다. 그러다가 ‘이놈들 놀려줄까?’ 하고 마음을 먹기라도 하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새들이 휘리릭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으리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으로 관점의 중요성을 묘사하는 기사가 있어 소개해 본다. 미국 과학자들이 10여 년간 땅 속(5km 이상 깊은 곳에 있는 대륙 내 광산) 깊이 들어가 미생물 표본을 채취해 봤더니, 지구 표면이 사는 인간 생명체 전체를 합친 것의 수백 배에 달하는 양의 박테리아를 비롯한 생명체가 ‘이미’ 살고 있음을 밝혀냈단다. 생명주기가 무려 수백만 년에 이르기도 하는 미생물까지 수백만 종이 땅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구상에 우리가 세대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저 세 들어 사는 신세였다니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