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이씨 문중의 서당인 강학당을 살펴보자. 강학당은 1867년(고종 4년)에 세워졌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知足堂, 李挻祥, 788~1846)이 고향에 내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지족당의 아들 경암 이재목(敬庵, 李在穆, 1817~1879)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강학의 규례를 만들었다. 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익혔는데 이는 지방의 선비와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에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들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함께 하며 사회생활과 예절을 배웠다. 이후에 그 문하에서 배운 제자와 종친들이 경암의 뜻을 받들어 세운 서당이 바로 강학당이다. 마을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며 두 번째 다리를 만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심수정과 강학당이 있다. 화려한 정자로 손꼽히는 심수정의 커다란 회화나무에 이끌려 머문 대문은 들어갈 수 없게 문이 굳게 닫혀있다. 아쉬운 마음에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개미 한 마리 지나갈 틈도 없다. 지쳐서 고개를 들어 오르막 위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숨바꼭질하듯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바로 강학당이다. 대문도 없고 벽도 보이지 않아 가파른 길을 몇 걸음 오르면 보이는 아담하고 자그만 건물이 바로 강학당이다. 강학당은 밖에서 보면 울창한 숲과 집사이로 보일 듯 말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독립된 건물 1채가 ‘ㄱ’자로 지어진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로 종가인 무첨당과 물봉골을 마주하고 있다. 2칸 짜리 대청인 ‘강학당’ 현판이 걸린 마루에는 훈장님이 계신 명리재(明理齋)와 관선료(觀善寮)는 학생들이 공부할 수있는 공간이다. 감출 것도 보여줄 것도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 수 있지만 학교는 기본적으로 스승과 학생들의 공간이다. 성주봉의 포근한 자락 속에서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빛나고 있는 듯,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던, 미래의 인재를 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야기 하면서 장난도 치고 뜀박질에 숨바꼭질 등, 까르르 웃음소리에 마을이 반짝이고 있다. 미래의 인재들이 수놓는 학교, 자그만 건물이 그대로 내 눈에 담기는 듯,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을 활짝 열어 놓았다. 서당은 백성들이 교육과정은 강독, 제술, 습자가 있는데 모두 개별교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처음엔 먼저 한자를 익혀야 하므로 천자문, 다음으로 동몽선습, 마지막으로 소학으로 마무리하였다. 특히 동몽선습(童蒙先習: 1543년에 평양감사인 민재인(閔齊仁)이 지인들과 함께 지었다. 처음으로 글을 배우는 아이들을 위하여 지은 책으로 유학의 핵심윤리인 오륜(五倫)과 중국과 한국의 역사로 구성)은 분량은 적지만 매우 간략하고 조리가 있어 왕실에서도 세자교육으로 활용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 전엔 전국을 유람하면서 지냈다. 조선 말기에는 왕권이 땅에 떨어져 왕족들은 세도가들에게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 대원군이 양동마을을 방문했을 때 문중에서 극진히 대접을 하자 그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남긴 현판이 바로 좌해금서(左海琴書)로 ‘영남의 학문과 풍류’라는 뜻으로 무첨당 대청 옆 사랑방 문 앞에 걸려 있다. 이처럼 양동마을에는 대과급제자가 배출될 정도로 학풍이 높은 곳이다. 강학당과 안락정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곳이다. 더우기 안락정이나 경산서당과 달리 대문이 따로 없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훈장님은 고매하신 문중어르신일수도 있고 인근에서 인품과 학문이 빼어난 분을 모셔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강학당은 무엇보다도 자체에 장판각, 즉 서고를 두어 도령들이 공부를 하면서 다른 서책도 같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공부는 교재도 필요하지만 배운 것을 익히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를 배웠지만 다양한 관점을 독서와 토론으로 자신의 안목을 키워나가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친구와 동료는 그래서 더욱더 중요하다. 글=윤영희 경북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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