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나라는 아미타여래가 있는 극락세계, 비로자나여래가 있는 연화장세계, 약사여래가 있는 유리광세계 등 수많은 정토(淨土)가 있지만 불교의 주 관심사는 석가여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사바세계에 있다. 그러므로 많은 여래 가운데 가장 친숙한 여래는 사바세계의 석가여래이므로 불국사에서는 석가여래의 사바세계를 아미타정토보다 더 높은 곳에 배치하였다.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의미이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의 삶이니 내일 무엇이 되느냐보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옛 신라 사람들은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시하였기에 가람배치를 이와 같이 하였을 것이다. 즉 우리의 이상은 저 멀리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연화장세계로 변모시키는데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력과 실천으로 깨침에 다다르면 이 사바세계가 가장 훌륭한 정토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불국사의 사찰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다보탑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탑이다.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원래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이라고 하며 『법화경』 「견보탑품」에 조성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내용은 보정(寶淨)나라에 계시던 다보여래께서 이렇게 서원(誓願)하셨다고 한다. “내가 만약 성불하였다가 열반한 뒤에 시방의 국토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는 데가 있으면, 나의 탑이 그 경전을 듣기 위하여 그 앞에 솟아올라 증명하면서 거룩하다고 찬탄하리라” 이 탑은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 형태의 석재를 목조 건축물처럼 짜 맞춘 것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탑이다. 계단 아래쪽에는 유구(遺構)로 보이는 돌기둥만 남아 있지만, 원래 네 방향에 조성된 계단에는 난간이 있었다. 그리고 1층 지붕돌에 해당하는 얇은 석판 위에 난간이 있고, 그 위에도 팔각형의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계단 위쪽 상대 갑석 위의 네 귀와 중앙에 각각 하나씩 다섯 개의 기둥이 있어 얼마간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간은 「견보탑품」에서 다보여래의 소리가 들린 곳을 상징한 것으로 여겨지며, 아울러 천만의 방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네 귀퉁이의 기둥머리 모양이 마치 목조 건물에서 지붕을 받치기 위해 짜 올린 두공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선 모양으로 된 여덟 개의 기둥 위로 올린 팔각의 석판은 번개(幡蓋)*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탑신의 석재 조각에는 연화(蓮花) 외에 죽절(竹節)의 기둥, 개석(蓋石)을 받드는 난초꽃 모양의 받침, 그리고 국화 모양의 받침돌, 개석의 구석에 붙은 매화 모양의 장식 등이 있는데, 이를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이 다보탑은 1925년 일제에 의해 전면 해체·복원하였는데 아무런 보고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특히 탑 속의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묘연하다. 기단 위에 있던 4마리의 돌사자도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1925년 이전까지는 돌사자 4마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후 3마리가 누군가에 의해 해외로 반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자도 기단 서쪽 면 중앙에 있는데 그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분황사 석탑이나 화엄사 4사자석탑, 흥덕왕릉에 있는 사자는 네 마리가 모두 네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다보탑도 네 귀퉁이에 불법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사자를 배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대동이나 용문의 석굴에 새겨진 삼층 탑 안에 석가와 다보 두 부처를 병좌(竝坐)시켜 이 탑을 다보탑이라 했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이와 같은 중국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다보탑을 조성했다.*번개는 번(幡)과 천개(天蓋)를 이르는 것으로 번은 부처와 보살의 위덕과 무량한 공덕을 나타낸 깃발과 비슷한 것으로 불전 내의 기둥이나 법회가 진행될 때 당간에 매달아 세웠다. 천개는 불교의 장엄구로서 귀인의 상징으로서 존상의 머리 위에 펴던 양산형의 장식이다.**일제강점기 언론인인 이원조의 기행문(조선일보 1935년 3월-4월 게재)에 의하면 이 돌사자가 극락전 축대 위 오른쪽 기둥 옆에 있었다고 한다.
글=하성찬 시민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