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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면 많은 이들이 노란 은행나무 빛을 찍기 위해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깊은 골짝의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찾는다. 안동권씨의 자취가 깃든 운곡서원은 고려조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784년(정조8) 추원사(追遠祠) 창건을 시작으로 순차적인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고, 지역의 학문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1930년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다. 서원 한편에는 1811년에 건립된 유연정(悠然亭)이라는 소담한 정자가 있고, 아름다운 조망과 일년내내 맑은 물소리가 들려 많은 유객들이 정취를 좇아 이곳을 시끌벅적하게 만든다.『운곡서원지(雲谷書院誌)』를 보면, “순조 11년 신미년(1811) 3월에는 산장을 권병수(權秉銖)로 하고, 유사를 권치발(權致發)로 하였다. 이해 윤3월4일에 사조암(思祖巖)의 폭포 언덕 끝에 유연정(悠然亭)의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다. 5월7일에는 주사(廚舍) 3칸의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렸으며, 9월에 두 공사를 마쳤는데, 이 공사의 성조도감(成造都監)은 권달환(權達煥)이, 회계도감(會計都監)은 권철환(權轍煥)이 맡았으며, 별임(別任)은 권종식(權宗湜)이다. 이때 유연정의 상량문(上樑文)을 청안인(淸安人) 감역(監役) 이수인(李樹仁)이 지었다”며 건립내역을 소상히 밝힌다. 유연정(悠然亭)이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시 가운데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꺾어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뜻을 취하였다. 이는 술이 아니라 도에 취해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한 후에 세상을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고 주돈이(周敦頥,1017~1073)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인용해 맑고 고명한 인품의 심오함과 자연과 벗 삼은 초월적 삶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송서(宋書)』를 보면, “황정견이 칭송하길, 주돈이의 인품이 매우 고명하여,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도다.(庭堅稱 其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며 북송의 학자 황정견(黃庭堅,1045~1105)이 주돈이를 존경한 말을 인용해 옛사람의 풍모(風貌)와 정사(政事)를 베푸는 도리를 알고자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모든 건축물에 달린 현판과 기문에는 유학이 주는 깊은 뜻과 스스로 이루고 지키고자하는 의지가 새겨져 있다. 유연정 역시 도연명과 주돈이의 사상을 본받아 바르게 살고자한 안동권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으니 그 기문을 풀어본다.
유연정기(悠然亭記) 신라고도에서 수십리 떨어진 구름 깊고 골짜기 깊은 곳에 ‘유연정’이 있는데, 이곳은 안동권씨(영가씨)가 선조를 사모하는 별업(別業)이다. 옛날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이 고려조에 공을 세워 영가씨의 조상이 되었고, 유풍의 여운이 후세에게 전해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와 귀봉(龜峯) 권덕린(權德麟,1529~1573) 두 선생이 있었다. 이에 순서에 따라 뒤를 이어 현달한 후인들이 그들을 경모(景慕)하여, 정조년간 갑진년(1784)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사당에 세 분을 배향(配享)하고 제사지내는 의로움을 펼쳤다. 28년 후 신미년(1811)에 후손 권달환(權達煥)·권철환(權轍煥)이 집안사람과 모의하여 사당 곁에 이 정자를 건립하였다. ‘유연’이라 이름한 것은 도정절(陶靖節:도연명)선생의 채국(採菊) 시구에서 취하였고, 또 주돈이의 광풍정(光風亭)·제월정(霽月亭)을 본떠서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었다. 지금 두렵고 중첩된 절벽이 변하여 의례(儀禮)의 기단이 되고, 정자가 홀로 우뚝하게 섰으니, 매년 제사 때가 되면 이곳에 선비들이 모이고, 이곳에서 예를 강론하고, 이곳에서 지난 자취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현자를 숭상하고 사모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정자에 기문이 없었기에, 하루는 귀봉선생의 주손 권경술(權警述)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이 고을에 살면서 조상의 유업을 잇는 뜻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문미(門楣)에 공경히 적는다. 마치 숲과 골짝의 아름다움 그리고 바위와 대의 기이함 그리고 계절마다 안개와 구름 그리고 아침저녁의 빼어난 다른 모습은 경치를 완상(翫賞)하고 유람하는 자들이 스스로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을사년(1965) 늦봄 하순에 오천 정석호(鄭錫祜) 삼가 적다.
글.사진제공=오상욱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