뻗어가라 ‘황남’… 폐교 위기 극복하고 용강에서 새로운 웅교 역사 이어가
교명 ‘황남’ 존속시키며 모교 계승발전과 새로운 용강동 시대 열어
어릴적 모교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산다. 소중하고 애틋한 추억이 깃들어있고 어린시절의 꿈과 희망을 싹틔웠던 터전이기 때문이다.
황남초등학교(이하 황남초)는 황남동에서의 80년 명운을 다한다. 동문들이 뛰어 놀던 교정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황남초 총동창회는 지난 11월 3일 황남동 교정에서의 마지막 체육대회를 가졌다.
1만 8000명의 졸업생과 함께 2만여 명의 동문이 있는 역사와 전통의 학교인 황남초는 이제 80년 황남동 시대를 마감하며 명문 초등학교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 갈 용강동 시대를 열게 된다.
2019년 3월 ‘황남’이라는 교명을 보존한 채 용황지구로 이전해 재도약 하는 것이다. 황남초는 지난 80년간 번성과 영화, 혹은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20여 년전부터 문화재정비사업 등으로 인구가 격감한 것이다.
황남초 학구 내에는 신라 왕릉을 비롯해 신라의 왕궁과 월성, 첨성대, 계림 등이 모여 있어 신라의 정기와 화랑정신을 이어받은 터전 자체가 유서깊은 학교다.
황남초는 일제의 암흑기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교육으로 나라를 구하자’라는 정신으로 인재 양성의 도량으로 성장해왔다. 수많은 졸업생들은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걸출한 인물들도 다수 배출한 저력있는 명문학교다.
현재의 황남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동네로 경주 관광 일번지다. 그 중심에서 합병과 폐교 위기에 몰렸지만 용강동으로 이전하기까지 황남초의 최근 몇 년은 지난했다.
그러나 부지의 중요성과 함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인 황남초는 위상도 함께 높아졌다. 새 학구인 용강동에서 우뚝하게 교육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의 우리 황남, 힘차게 나아가자’ 라는 교가의 한 대목처럼 길이길이 존속되는 황남이 실현된 것이다.
김용구 교장과 직전 총동창회 김영록 회장과 황남초 동문들을 만나 학교 이전에 대한 감회와 앞으로 펼쳐질 황남초의 미래에 대해 들어 보았다.
-황남초등학교의 80년...1940년 개교하고 1972년 38학급, 재학생 2769명, 526명의 최다 졸업생 배출하기도 황남초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4월 ‘황남공립심상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학급 규모로 태동한다. 같은 해 5월 경주향교 명륜당에서 수업을 시작해 정식 개교하고 12월 신축교사를 완공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이듬해인 1941년 ‘황남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2학급으로 편성한다. 1945년 14학급을 편성하고 그해 9월 한국인으로 김인식 초대 교장이 부임한다. 1946년 감격적인 첫 졸업생 79명을 배출해내고 1950년 한국전쟁시에는 육군 제18병원에 교사 일체를 인도하고 1955년 마지막 교사 전체를 국군으로부터 인수하게 된다.
1978년에는 2학년 8학급 2부제 수업을 실시하는 등 45학급이 편성된다. 1982년 45학급 편성 외 특수 1학급이 편성되고 1996년 ‘황남초등학교’로 교명이 개칭됐다. 2007년 경주과학발명교육센터를 개관하고 2016년 경북인성교육우수고 표창, 2018년 2월 제73회 졸업식(졸업생 6명)을 가졌다. 지금까지 총 1만 80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2018년 현재 초등 5학급, 유치원 1학급, 특수1학급이다. 1970년 이후의 ‘황남초등학교 학교 연혁지’에 의하면 가장 학생수가 많았을때는 1972년으로 38학급, 2769명으로 526명의 최다 졸업생을 배출했다.
1973년에도 2590명이었으니 70년대가 학생수로는 정점이었다. 한편, 신축교사증가로 1982년과 1983년 45학급으로 학급수는 가장 많았다. 이후 2000년엔 661명, 18학급으로 학생수가 대폭 줄어든다. 2010년 11학급 220명으로 격감한다. 2012년 141명, 2013년 91명, 2016년부터는 재학생이 50명 이하로 지난해 졸업생은 6명으로 최저 졸업생이었다. 현재 재학생은 41명이다. 교훈은 덕(德, 바르게) 체(體, 굳세게), 지(智, 지혜롭게)며 교목은 향나무, 교화는 백목련이다. 한편, 제1회 졸업생인 박한석 선생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고 한다.
황남초를 빛낸 인물들이 많다. 조덕수 제일금속 대표(고암 장학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주낙영 경주시장(명예졸업생), 장윤익 전 동리목월문학관장, 이태형 수봉학원 경주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주한태 동리목월기념사업회장, 아이돌 그룹 원더걸스의 멤버였던 선미(당시 전교 회장·사진), 가수 한혜진, 엄기백 전 경주예술의전당 관장(전 KBS PD), 황남빵 최상은 대표, 화가 김영길, 김하준 전 청와대 문교수석, 한석기 전 경주대학교 총장, 현대중공업 박정봉 부사장, 권영길 전 경주시의회장 등 이밖에도 나열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동문들이 각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제24대 황남초 김용구 교장, “교명 존속돼 이전하는 것은 2만 동문들이 이뤄낸 결정체” 천년 사직의 숨결을 간직한 옛 터전에서 ‘첨단과 전통에 빛나는 알찬 학교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는 제24대 김용구 교장은 황남초 24회 졸업생으로 현재 모교에 재직중이다.
폐교 위기 의식을 모교 발전의 기회로 승화시킨 주축인 김용구 교장은 “전성기 재학생은 2800명이 넘어 2부제 수업을 했던 웅교였으나 사적지 내 가옥 철거 등으로 학생수가 격감하면서 전교생 40여 명의 소학교로 전락해 폐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황남교육가족들이 일치단결해 위기를 기회로 삼아 내년 3월 1일 새로운 거주지역으로 부상중인 용강동으로 이전하게 됐습니다”라면서 이는 모교의 계승발전뿐만 아니라 소규모 학교 정책의 우수 사례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장의 모교에 대한 열정과 기억은 남달랐다.
“80년대 큰 화재가 두 번 발생해 교사가 전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료가 보존돼 있지 않는 편입니다. 제가 4학년이었을때는 6개월은 본교에서 공부하고 6개월은 계림숲 노천 교실에서 공부하기도 했죠”
김 교장은 특히, 내년 3월 황남초의 이전과 동시에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어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월성초등에 합병될 위기에 있다가 교명이 존속된 채로 이전할 수 있는 것은 동문들이 이뤄낸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참뜻을 이제는 지역민과 동문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명 ‘황남’은 동네 지명이기 전에 2만여 동문들이 80년간 함께 이룬 대명사로서의 ‘황남’입니다. 앞으로의 용강동 시대는 황남이라는 교명과 함께 역사와 학적, 교가 등을 그대로 이전할 뿐입니다. 현재 본교생 41명의 무궁화꽃을 용강동 교정에 심어서 주인의식을 되새길 것입니다. 또 개교식때 구 교정의 흙도 옮겨갈 것입니다”
올해 3월 이 학교에 지원해서 재부임한 김 교장은 진정한 황남인이었다.
-황남초등학교 총동창회...“용강에서의 ‘황남’, 많은 후배들 생겨 희망적인 터전이 될 것” 총동창회는 1975년 발족해 1991년 ‘황남동문’ 창간호를 발간하고 1994년 동창명부를 발간한다. 1996년 총동창회 제1회 체육대회를 모교운동장에서 개최하는가하면 2015년 개교 75주년기념 제1회 황남인의 밤 행사에 28개 기수가 참여해 동문들의 결속과 화합을 다진다. 그간 다소 활동이 주춤했던 총동창회는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열정적인 활약으로 총동창회를 튼튼한 반석위로 올려놓게 된다.
동문들은 황남에서의 기나긴 역사를 바탕으로 우여곡절 끝, 안타까웠던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며 직전 총동창회 김영록(21회) 회장은 첫 일성을 뗐다. 김 회장과 사무총장 오연진(26회), 최창호 홍보부장(32회), 사무1차장 남병인(37회) 동문이 함께 한 자리는 추억담으로 왁자했다. 그들은 재학 당시를 떠올렸고 앞으로 펼쳐질 황남초의 발전적 행보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김영록 직전회장은 “이 학교 부지는 3필지 6580평으로 현재는 경북도교육청이 소유주입니다. 중차대한 민원의 중심에 있는 부지인만큼 황남초 이전 후 방안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것이 사실이잖습니까 그래서 황남초등학교 총동창회의 입장을 천명한 바 있는데요, 바로 ‘황남초 부지가 어떻게 활용되든 80년 역사의 황남초등학교 역사관만은 적절한 면적으로 반드시 확보돼야만 전체 동문들이 찬성한다’는 것입니다”라며 전체 동문은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활용은 찬성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거리로 가꿔지길 바란다고 재차 강조했다.
오연진 동문은 “학교 이전은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황남의 뿌리가 남아있으니 다행이지요. 학생수가 격감하는 등 현실적으로 존속이 불가능하다보니 폐교만은 막고 싶었고 이전을 지지했습니다. 이전한 학교에서 더욱 번창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했다.
남병인 동문은 “신구가 조화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황남동에서의 80년은 구역사로 정점을 찍었고 다가올 용강동 시대는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폐교의 기로에 서있는 것 보다는 많은 후배들이 생겨 희망적인 터전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최창호 동문은 좀 더 발전적인 총동창회를 구축해 용강동 시대의 학교 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가을운동회 4부자 달리기 대회, 교사 신축할 당시 본교에서 경주공고 임시 가건물까지 강냉이 죽 배식하던 추억” 김영록 동문은 3학년때(62년) 학급반장이었다. 교사를 신축할 당시 경주공고 임시 가건물에서 수업을 했는데 강냉이 죽을 배식했던 추억담을 들려주었다.
“매일 당번 두 명이 황남동 본교로 가서 큰 통에 죽을 담아 들고 경주공고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10살짜리 소년 두 명이 그렇게 했던 거죠. 담당교사는 고생한다고 죽을 한 국자 더 줬는데 힘들었지만 무척 신났습니다”라는 재밌는 회고에 이어 최창호 동문은 “남부교회쪽 일명 ‘납딱굴’이라 불리는 굴처럼 생긴 임시 목재 교사에서 출입문을 헷갈려하던 일이 생각나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또 가을운동회를 하거나 소풍날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라며 추억을 쏟아냈다.
추억담이 무르익어 갈 즈음 동문들은 말들이 부쩍 많아지면서 ‘껄걸’ 웃음이 넘쳤다. 그 밖에도 여 선생님이 좋아서 일부러 숙제를 하지 않고 선생님과 함께 나머지 공부를 했던 일, 봉황대에 올라가 미끄럼 타던 일, 반월성, 첨성대로 놀러 다닌 일, 귀했던 달걀로 만화가게서 만화와 사탕을 물물교환해 만화를 실컷 보던 일, 가을운동회때 4부자 달리기 대회(학생이 3명, 아버지 이어달리기 형식으로 당시 이 경우에 해당되는 가정이 많았다고 함)서 달리던 기억 등의 추억담이 무궁무진했다.
황남인들의 모교애는 참으로 각별했다. 모교애야말로 바로 이 학교 발전의 성장동력이었다. 그래서 용강동에서의 황남초의 미래는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뛰어 연못에서 논다)’할 것으로 보였다.
사진제공: 황남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