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인 경주국립공원 남산에는 수많은 고적(古蹟)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삼릉을 지나 상선암을 오르면 널찍한 바둑바위를 만나는데 바로 남쪽 자그만 봉우리에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거문고의 달인 옥보고(玉寶高)의 전설이 서린 금송정(琴松亭)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경주부」에 “금송정은 금오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면서 놀며 즐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의 사찬(沙飡) 공영(恭永)의 아들로 경덕왕 때 사람이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웠고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지어서 전하니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琴松亭在金鰲山頂, 玉寶高彈琴遊樂之處. 寶高新羅沙飡恭永子, 景德王時人. 入智異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傳之, 謂之玄鶴琴, 又云玄琴)”기록한다.
『삼국사기』「악지(樂志)」의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인용된 왕산악(王山岳)은 고구려 때 거문고 제작과 연주의 대가였다면 신라에는 거문고 명인 옥보고가 있었다. 옥보고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담당한 당나라 옥진서(玉眞瑞)의 후예로 지리산과 경주남산 등에서 활약한 일화가 유명하다. 조선유교 사회에서 선비들은 거문고의 현란한 연주 기교보다 음악을 통한 성정(性情)을 기르는 정신적 수양을 위해 거문고를 가까이하였고 신라의 옥보고와 거문고는 늘 유자(儒者)들에게 회자(膾炙)되었다. 특히 경주에 대한 고적 등을 읊조릴 때 옥보고와 금송정은 빠지지 않는 문학적 단골 소재였고 경주의 매호 손덕승(1659~1725)·화계 류의건(1687~1760) 등 그리고 권위(權暐,1552~1630)·권우(權宇,1552~1590)·이광윤(李光胤,1564~1637)·권상일(權相一,1679~1759)·김매순(金邁淳,1776~1840) 등 많은 문인들이 옥보고와 금송정을 언급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추강집』권6「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선법(禪法)을 익힌 형수좌(泂首坐)에게 전해 듣기를 신라의 경덕왕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구경·꽃감상하다가 문득 거문고 소리를 들었는데 문복(聞福) 안장(安長)과 견복(見福) 청장(請長)악사에게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하니, 두 사람은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라 하였다.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芸,1517~1572)은 1569년 경주부 집경전 참봉을 지냈으며 자옥산·포석정·금송정 등을 시로 읊조렸다. 『瞻慕堂集』卷1,「詩·琴松亭次天成韻」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은 경주부윤을 지낸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과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평생을 진주에 살면서 만년(77세)에 지역의 역사 지리 풍토에 관심을 갖고 「동도유적(東都遺蹟)27수」·「서도유적(西都遺蹟)12수」 등을 저술하였다.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과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김해부에 정배(定配)되었고, 1808년에 신라·고려·조선 초기에 이르는 영남의 역사적 인물과 지방의 전설과 풍속을 소재로 영남악부(嶺南樂府)를 지었다. 『洛下生集』冊6,「嶺南樂府」「玉寶高」/冊20,「東事日知」「玄琴」
식산집(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173편의 방대한 유기작품을 남길 정도로 유람을 즐겼고 경주부를 유람하고 「동도잡록(東都雜錄)」을 지었다. “가야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악사 우륵(于勒)이 악기를 가지고 달아났는데 신라의 국원(國原)에서 머물며 지법(知法)ㆍ계고(階古)·만덕(萬德)에게 명하여 가야 12곡을 전수받게 하였다. 우륵은 12현금을 만들었고 또한 거문고[玄琴]를 만들었다. 왕산악은 칠현금을 얻어서 그 체제를 변화시켜 명하여 거문고라 하였다. … 그것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수하였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수하고 귀금은 안장에게 전수하고 안장은 그의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수하였다. 극종의 후예가 평조(平調)ㆍ우조(羽調)를 전수하였는데 모두 187곡이고 향비파(鄕琵琶)를 지었는데 궁조(宮調)·칠현조(七賢調)·봉황조(鳳凰調)로 모두 212곡이다. 그렇다면 옥보고는 실로 우리나라 거문고 음악의 시조인데 지금 30곡 가운데 하나도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라며 옥보고와 음악의 전수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