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정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셋째손자인 설천정 의활(1573~1627)이 1602년에 건립하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공간이다. 오랜 세월 건재하다가 200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물봉동산 서쪽기슭에 위치한 무성한 숲 사이로 여름의 뜨거움을 피하며 넓은 안강들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아주 시원한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정자(亭子)는 익숙하지만 정사(精舍)는 낯설다. 그 차이점을 보면 정자는 휴식이나 전망을 즐기기 위하여 지은 공간인 반면 정사는 학문을 하면서 정신을 수양하는 곳으로 정의할 수 있다. 마을 안에는 정자가 10개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사는 유일하다. 건물만 보면 차이를 실감하기는 어렵지만 건축주가 지은 목적은 정문인 향양문(向陽門: 태양을 마주한다)으로 한 점 부끄럼 없이, 선조(회재)에게 누가 되기 않기를 바라는 설천정의 마음자세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의활은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 고령 현감을 지내다 1618년 무오년에는 증광시(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시 실시하던 임시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과 함경도사를 지냈으나 1620년에는 이이첨 등의 전횡을 볼 수가 없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이첨은 참형되었다. 그 후 설천정은 흥해군수를 지내다 집무 중에 순직하였다.
정사는 안강들을 가로지른 길로 들어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보일락 말락, 좁고 경사진 비탈길을 찾아 잠깐 오르면 향양문을 마주할 수 있다. 정사는 남향으로 담을 꽤 널찍하게 둘러두었고 북쪽은 경사도 심하지만 대나무가 무성하여 오르기 어렵다.
보통 대문을 열어 두지 않아 그 옆길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행랑이 보이고 왼쪽으로 협문이 보인다. 정사는 막돌로 쌓은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인데 서쪽 4칸은 대청, 동쪽 2칸은 온돌방이다. 올해처럼 길고 무더운 여름이면 분합문(分閤門)과 판문을 열어 여름을 나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우리나라는 여름에는 마루에서 더위를 식히고 겨울에는 온돌을 데워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 늦가을 어느 날, 따뜻한 온돌방에서 책을 보다 문득 빗방울소리에 창문을 열면 그 아련함은 끝없는 사색에 잠기게 한다. 해맑은 젊은 서생의 눈길과 마주치는 듯...
양동마을에서 일을 하다보면 보통은 종가집과 관가정만 들어가 해설을 한다. 마을을 와 보면 알겠지만 마을은 아주 넓고 가파른 곳도 많아 걸어 다니기가 만만치 않다. 특히 더운 여름날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그 때 생각나는 곳이 바로 설천정사다.
관가정을 둘러본 후 협문을 나와 편안한 산책길을 뒤로 하고 물봉동산을 오르면 사위가 확 트인 곳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올여름은 어느 해보다도 무더웠다. 크고 오래된 나무아래가 아니면 햇살이 나만 따라다니는 듯하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어느 가수의 노래제목이 생각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나무를 등지고 서쪽으로 내려오면서 영귀정을 스쳐지나 설천정사로 태양을 피하기로 했다. 언제라도 나를 반겨주는 조용하고 풍광 좋은 곳에 앉아 있으면 가까이는 안강들, 멀리는 경주 가는 길이 아련하다. 지인들과 함께 마루에 앉아 지나간 시간으로 되돌아가 오붓한 시간을 지냈으면 그 얼마나 좋으랴! 하나 아쉬운 것은 나무가 너무 많이 정사를 가리고 있고 마당도 이끼로 가득한 것이다. 정비를 제대로 했으면 좋을 것 같다.
정사 협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중국 주엽나무가 있다. 본디는 회재의 지인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회재를 생각하며 가지고 온 귀한 나무로 독락당 울 뒤편에 심은 500년 정도 된 큰 나무로 천연기념물 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무를 나누어 심어 옥산과 양동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후손들이 회재 할배를 생각하면서 분재하였을 테니 젊은 선비들이 회재를, 선조를 기리는 마음이 눈에 보인다. 주엽나무는 한반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독락당에 있는 중국 주엽나무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나무의 커다란 가시로 찔리면 장난이 아니다.
협문 앞에는 아담한 관리사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사이에는 지금은 불타버린 살림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밭을 일구어 오이와 호박 등 야채를 심어둔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관리사(행랑채)는 일자형 건물로 정면 네 칸, 측면이 한 칸이다. 특히 내부의 공간구성이 아주 짜임새가 있는 작은 집이다. 지금 거주하시는 분께 양해를 구하고 올라가보니 여자들은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턱이 높다.
지금은 내부를 개조하여 조금은 편리해졌다고는 하나 예전엔 손바닥만 한 좁은 공간에서 허리 펴고 일어서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평생을 일에 묻혀 살았던 하인들의 공간을 보는 듯 짠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