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보문리 손곡동(蓀谷洞)에는 처사문인 자희옹(自喜翁) 최치덕(崔致德,1699~1770)의 종오정(從吾亭)이 자리한다. 최치덕은 이곳에서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며, 경주의 문학과 도통연원을 이었다. 특히 『자희옹선생문집』에서 자주 언급되는 남용만(南龍萬,1709~1784)·이시철(李時喆)·홍양호(洪良浩)·이범중(李範中)·최달극(崔達極)·오만중(吳萬重) 등과 종오정을 중심으로 때에 맞춰 회합과 교유하였고, 흥이 나면 노래하고, 술을 얻으면 함께 즐겼다.不期來兩賢(불기래양현) 기약 없이 찾아온 두 현자 含笑下堂前(함소하당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였네 細柳風和日(세류풍화일) 가는 버들엔 바람이 온화하고 疎桐月午天(소동월오천) 성근 오동엔 낮달이 걸렸어라 呼童調饌味(호동조찬미) 아이 불러 음식을 장만하게하고 留客起茶煙(유객기다연) 객을 붙잡아 차 연기 피우누나 火食非淸分(화식비청분) 화식은 맑은 자의 수행 아니거늘 巖居豈日仙(암거기일선) 은거한들 어찌 날마다 신선이리오 최치덕은 두 친구를 만난 기쁨에 「이이향오평보견방(李二香吳平甫見訪)」 시를 지었고, 이범중[二香]·오만중[平甫]과는 오랜 사이로 종종 만나 차를 마시고 학문과 세상사를 담론하였다. 봄날 세버들 피고 오동나무 꽃이 피는 화창한 날에 기약 없이 종오정을 찾아온 손님이라, 급히 아이 불러 음식을 차리게 하고 차를 끓이고, 시끌벅적 때아닌 세속의 모습에 오늘은 잠시나마 신선의 세계를 내려놓고 친구와 담박한 얘기를 나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곳에 살면서도 사람이 찾아오길 은근히 기대하였고, 문득 찾아온 반가운 만남은 하루쯤 신선 노릇을 그만두게 할 정도로 컸다. 같은 산자락 가까이 살면서 만나기 어려운 것이 얼마나 오래였던가? 지난번 덕으로 품어준 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삼가 다 살펴보지도 못했네. 날씨 화창하고 고요한 날에 심조(深造)의 극처(極處)를 관망하고 놀지 않겠는가? 나는 산수 사이에서 스스로 만족할 따름이라네. 적이 같이 공부한 몇 사람이 봄 복상(服喪)을 당해 풍속의 사고가 없지 않겠지만, 약속대로 동지들이 왕림해서 한번 모이는 것이 어떠한가? 『自喜翁先生文集』卷2,「書․與南鵬路」 윗글은 명활산 자락에 한한정(閑閑亭)을 짓고 사는 친구 남용만에게 보내는 편지로, 좋은 시절 종오정에서 한번 만나 회합(會合)하길 바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처럼 종오정을 다녀간 많은 문인들이 시와 기문 등을 남겼고, 덕분에 손곡동의 자그만 정자에는 문인들의 책향기가 짙었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벽촌의 살림 때문에 유쾌한 회합을 이루지 못할 적도 있었다.
어느 봄날 양동마을의 이범중은 날을 정해 종오정에서 만날 것을 청하였으나, 최치덕은 “나는 산에 사는 것이 본업이라 봄이 와도 한가로울 틈이 없고, 다른 소득도 없습니다. … 우선 며칠 더 기다립시다. 좋은 시구를 보내 주었는데 서투른 봉사(奉謝)를 잊을까 걱정입니다. 날짜를 수정해 주길 바랍니다.”라며, 아쉽지만 아직 산나물도 나오기 전이라 만나더라도 대접할 것이 변변찮아 날을 뒤로 미룰 것을 청한 일도 있었다.
종오정의 수창시(酬唱詩)는 연구대상이며, 최치덕은 세속을 피해 종오정을 짓고 은거하며,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몹시도 읊조렸다. 그에게 종오정은 내부적으로는 은거의 공간이자 선영(先塋)을 모시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공간이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산수를 즐기고 문인들과 회합하는 공간이자 강학의 공간이었다. 본 글은 [吳尙昱,「自喜翁 崔致德의 處士的 삶과 從吾亭의 位相」,『동양예학회』 36집, 2017.]에 실린 논문을 인용한 것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이 녹아든 종오정엔 지금도 선비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