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발레의 발상지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라고 답할 것이다. 발레하면 차이콥스키나 볼쇼이발레단이 떠오르는 탓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발레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이쯤에서 어떤 이는 프랑스가 정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발레 용어의 대부분이 불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도 오답이다. 정답은 이탈리아다. 발레 역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태동기의 발레는 왕실이나 귀족들이 사교 차원에서 추는 춤이었다. 오늘날의 발레와는 많이 다른, 가벼운 율동 정도로 보면 된다. 이러한 궁정발레는 16세기에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딸이 프랑스 왕실로 시집오면서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다. 이때 발레(ballet)라는 용어가 생겼다. 프랑스 궁정 발레는 국왕들의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발전하다가 루이14세(1638-1715)에 이르러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며,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이 된 루이14세가 발레 진흥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는 27편의 발레에서 주역을 맡은 발레리노였다. 그는 15세에 출연한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라는 작품에서 태양왕 역을 맡았는데, 별명 ‘태양왕’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루이14세의 각선미가 남다르다. 아마도 발레로 다져진 것이리라. 사실 루이14세의 발레 진흥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밑에 깔려있었다.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태양’과 같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했다. 이는 조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1809-1830)가 세도정치로부터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한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춤에는 왕실에 권위를 부여하고, 복종을 강제하는 강력한 정치적 기능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이14세의 발레 사랑은 정치적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1661년에 파리왕립무용학교를 설립하고, 1672년에 음악을 추가하여 왕립음악무용학교로 확장한다. 이 학교는 오늘날 프랑스가 자랑하는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학교설립은 상류사회의 전유물이던 궁정발레가 전문 무용수가 출연하는 극장예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라 실피드(La Sylphide)와 지젤(Giselle)로 19세기 중반을 풍미했던 프랑스 낭만발레는 이런 토양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이 정도면 루이14세를 근대발레의 아버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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