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축은 사바세계 위에 부처님의 나라가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불국사에 들릴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 좋은 곳을 나 혼자 독점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조선 선비인 이옥(李鈺, 1760~1812)은 ‘중흥유기(重興遊記)’ 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佳故來(가고래) 無是佳(무시가) 無是來(무시래)” 즉 아름답기 때문에 왔지,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란다. 이곳 불국사를 찾는 사람 모두가 이옥의 생각과 다르지 않으리라. 불국사 경내의 전각을 비롯하여 불상, 탑 등 모두가 아름답다. 심지어 축대까지 그냥 막 쌓은 것이 아니다. 불국사는 산지형 가람이라 경사지를 평지로 조성하기 위해 여러 층으로 축대를 쌓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아래와 위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축대의 위는 부처님의 세계이고 그 아래는 아직 불국에 이르지 못한 사바세계를 의미한다. 불국사 석축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와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냄으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대웅전 쪽 축대는 아래층에 막돌을 쌓고 그 위로 장대석을 놓은 후 앞면을 평평하게 깎은 작은 돌로 위층을 쌓아 이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자연석 윗부분의 굴곡에 맞게 장대석의 아래 부분을 깎아 다듬어 올렸다. 이와 같은 방식을 그랭이기법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이 축대가 천년을 버티어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법은 분황사석탑의 기단과 이곳 석가탑의 기단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축성 기술이 뛰어난 고구려로부터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아래 부분의 크고 작은 돌을 쌓은 축대는 사바세계를 상징하고 그 위 다듬은 돌은 불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가 하면 하단부의 자연석 축대를 구름에 비유하여 피안의 세계가 구름 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대웅전 쪽의 석축과 극락전 쪽의 석축을 비교해보면 둘 다 2층 구조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석축을 쌓아 올린 돌에서 차이가 있다. 대웅전 쪽의 돌은 자연석과 다듬은 돌을 쌓았으나 극락전 쪽은 아래 위 모두 다듬은 돌로 쌓아올렸고 동틀돌의 머리를 밖으로 길게 돌출시킨 점이 다르다. 바깥으로 튀어 나온 동틀돌 윗부분에 홈이 파여져 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극락전 서쪽 회랑의 석축은 불국사의 석축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바둑판모양의 사각형 격자 장대석에 동틀돌을 박은 뒤 사이를 잘 다듬은 돌로 채웠다. 그 위에 세워진 회랑의 기둥은 아래 돌기둥과 맞춰 세움으로서 회랑의 무게를 잘 견딜 수 있게 하였으며 특히 석축 가운데를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판석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지면이 경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는 비스듬히 올라가 마지막에 장대석과 만나서 하나가 되는 구조이다. 이것은 지나가는 사람이 눈높이를 수정하지 않고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대석재로 구획한 공간에 여러 형상의 돌을 채워 쌓은 가구식기법과 돌난간의 구성방식 등은 국내외를 통 털어 유일무이한 석조구조로 알려져 있다. 이 석축의 앞 지면에 장대석이 석축과 나란히 길게 깔려있는데, 이는 회랑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로 떨어져 땅이 파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땅바닥이 파이는 것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는 당시 신라인들의 치밀함에 놀라움을 넘어 전율이 느껴진다. 그러나 현재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지점보다 약간 바깥쪽에 있다. 이것은 회랑을 원래보다 규모가 작게 복원하여 처마가 창건 당시보다 안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축대의 동쪽에는 대웅전을 향하여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그 서쪽에는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연화교와 칠보교 두 쌍의 다리가 놓여있다. 이 가구식 석축은 보물 제174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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