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류인서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던 때나는 꼬리를 팔아 낮과 밤을 사고 싶었다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었다하지만 나는꽃을 샀다새를 샀다수수께끼 같은 스무고개 중턱에 닿아더 이상 내게 팔아먹을 꼬리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나는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치마와 신발을 샀다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췄다시장통 난전판에 핀 내 아홉 꼬리 어지러운 춤사위나 보라지꼬리 끝에서 절걱대는 얼음별 얼음달이나 보라지나를 훔쳐 나를 사는꼬리는 어느새 잡히지 않는 나의 도둑당신에게 잘라준 내 예쁜 꼬리 하나는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다
-구미호, 그 많던 꼬리는 어디 갔을까 구미호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꼬리는 여성의 매혹이며 힘의 기호다. 여성에게는 누구나 재 하나 넘을 적마다 꼬리 하나씩 새로 돋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다. 그 꼬리로 호리지 못할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꼬리에 해와 달을 매달아 지치도록 끌고 다니고 싶은 푸른 이상의 시절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는다. 일상에 몸을 담그는 첫 시간에는 꼬리를 팔아 꽃을 사고 새를 사는 꿈과 낭만을 택한다. 꽃과 새는 해와 달의 천상적인 꿈과 대비되는 지상적인 낭만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발을 뺄 수 없는 현실이라는 진창에 빠질 때면, ‘돋지 않는 마지막 꼬리를 흥정해/치마와 신발’이라는 지상의 삶에 함몰된 생을 사게 되는 것이다. 그 대가로 나는 ‘피 묻은 꼬리 끝을 치마 아래 감’추고 다니는 슬픈 숙명을 가지게 되었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아홉 꼬리는 얼음별 얼음달의 수난 속에서 절걱댈 뿐이다.
이 때 여성은 ‘나를 훔쳐 나를 사는’ 잡히지 않는 도둑의 시절을 거치게 된다. 앞의 ‘나’는 매혹이고 뒤의 ‘나’는 현실의 삶에 해당한다. 더 슬픈 것은 삶의 바꿔 잘라준 나의 예쁜 꼬리가 ‘그녀 가방의 열쇠고리 장식’으로 매달려 있음을 지켜보는 일이다. 나의 생의 핵심이 노리개 감이 되는 현실, 현실원칙에 얽매여 빛나는 시절을 잃어가는 여성의 비애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해내는 시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