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모 명문여대 역사학과 출신 기수별 총무모임에 경주의 역사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우스개 삼아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은 누가 만들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합창을 하듯 “아사달”이라 대답하여 깜짝 놀랐다. 다시, 그럼 이게 역사네요? 하니 “그럼요!”란다. 국어사전에는 설화(說話)에 대해 ‘있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사실처럼 재미있게 말함. 또는 그런 이야기’로 풀이하고 전설(傳說)은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로 적고 있다. 또 신화(神話)에 대해서는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 우주의 기원, 신이나 영웅의 사적(事績), 민족의 태고 때의 역사나 설화 따위가 주된 내용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에 역사(歷史)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역사는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존재해 온 자취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설화나 전설을 실제로 있었던 사실처럼 혼동하여 씀으로 해서 왜곡된 역사를 재생산하고 확대 보편화시키고 있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엄연히 앞선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이 모호한 명칭을 쓰고 있기도 하다.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인물은 소설가 현진건이 1929년 여름에 경주를 순례하고 ‘동아일보’에 연재한 기행수필 ‘고도순례 경주(古都巡禮慶州)’의 ‘무영탑(無影塔) 전설’ 부분에서도 당나라 석수(石手)로만 등장하여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그는 같은 신문에 연재한 소설 ‘무영탑(無影塔)’(1938.7.20-1939.2.7 총164회 연재)에서 처음으로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삼국유사’(1285)에는 불국사 창건에 대해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하며,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짓기 시작하여 그가 죽자 나라에서 완성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조선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東隱) 화상이 지은 약칭 ‘불국사 고금창기(佛國寺 古今創記)’에는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이라 하며, 당나라 장공(匠工)이 와서 만들던 중 그의 여동생 아사녀(阿斯女)가 찾아왔으나 큰 공사가 끝나지 않아 만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서쪽 10리쯤 되는 곳의 천연 못에 가면 비치리라 했으나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진건은 아마 이 기록을 보거나 듣고 기행문을 쓴 뒤 나중에 다시 가공하여 소설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아사달’은 소설 속 가공인물인데도 이를 마치 신라 역사 속 인물로 둔갑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영지 못 둘레에는 ‘아사달 아사녀 공원’을 조성하였는가 하면 주차장에 있는 관광 안내판에는 ‘경덕왕 때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을 때, 옛 백제지역 출신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곳이다’라고 아예 역사화 시켜놓았다. 또 불국사역 앞 구정로터리 가운데에는 아사달과 아사녀가 서로 만나는 형상의 대형 금속조형물을 세웠고 불국사 앞 동리목월문학관 뜰에는 ‘아사달의 혼(魂)’이라는 석재 기념탑을 만들어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탑이라 명명한 후 매년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심지어는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경주’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에게 교육까지 시키고 있는 실정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영지 못 들어가는 곳에 있는 ‘영지석불좌상(影池石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안내판에도 ‘영지(影池)는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든 아사달과 그 부인인 아사녀 사이에 얽힌 일화가 있는 곳으로 불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쓰고 있다. 참으로 웃지 못 할 헤프닝인 것이다. ‘삼국유사’는 ‘석굴암’이라 부르고 있는 사원을 ‘석불사(石佛寺)’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석굴암이라 부른 이후 지금까지도 본래의 이름을 회복하지 못한 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목록에도 암자로 명기되어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반월성(半月城)’을 ‘월성(月城)’으로 바꾸고 ‘안압지(雁鴨池)’를 ‘월지(月池)’로 바로잡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왜곡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낳는지를 보아왔다. ‘성덕대왕신종’은 구리로 만들 때 종의 몸에 그 이름을 아로새겨 놓았다. 그럼에도 어린 아이를 끓는 쇳물에 산채로 넣어 완성하였기에 종을 치면 소리가 끝에 가서 어머니를 원망하는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낸다하여 ‘에밀레종’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냈다. 지금은 사실의 역사처럼 온 국민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있다. 가을이면 억새군락으로 유명한 ‘무장봉’(624m)에는 등산객들로 붐빈다. 하지만 ‘무장봉’이라는 지명은 붙여진지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산 중턱에 있는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 때 세운 ‘무장사’ 터에서 따온 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조묵(1792-1840)이 쓴 ‘나려임랑고(羅麗琳琅攷)’(1824)의 ‘신라무장사비’에 의하면 ‘은참산(恩站山)’이라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왜곡의 하나이리라. ‘황남동 한옥지구’는 2012년 말 경주시에서 현황조사 및 정비기본계획을 완성하고 품격 높은 한옥마을 조성에 들어갔다. 점차 관광객이 몰리면서 몇 년 전부터 슬그머니 ‘황리단길’로 불리더니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부르고 있다. 경주시에서도 각종 공식서류에 아예 ‘황리단길’로 명명하고 있지만 엄연히 출처불명의 이름이다. 공식 명칭은 ‘포석로’이다. 관광객이 부르기 좋다지만 적어도 왜, 누가 지어 언제부터 그렇게 부르는지는 밝혀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부를 것인지도. 이미 누군가는 구체적인 설명 없이 ‘황리단길’을 위키백과에 살짝 올려놓았다. 서울 용산구의 ‘회나무로’도 도로명주소보다 ‘경리단(經理團)길’로 더 알려져 있다. ‘황리단길’도 여기서 모방한 아류인 것이다. ‘경리단’은 1969년부터 육군중앙경리단(현 국군재정관리단)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곳도 인근에 위치한 미군 부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외국인들의 주거단지로 자리 잡았고 식당과 술집이 늘어서며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가다 어느샌가 ‘경리단길’로 둔갑한 곳이다. 이후 이를 모방한 이름이 전국적으로 늘어나 망리단길, 송리단길, 평리단길, 봉리단길, 동리단길 등등이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황남동의 ‘황’에 마을을 뜻하는 ‘리’를 합성하여 ‘황리’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해보고자 하여도 ‘단(團)’에 대해서는 궁해지기 마련이다. 또 앞으로 이 한옥마을을 서쪽으로 더 확대하여 사정동 일원까지 넓힐 계획인데 그러면 그때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다같이 고민해 보고 고도 경주의 풍광과 신라의 얼까지 곁들어진 참 좋은 이름을 다시 붙여 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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