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클래식음악에 문외한이라도 카라얀(H.Karajan/1908-1989)이라는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34년 동안(1955-1989)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끌면서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했다. 음반판매량이 무려 2억장을 넘는다고 한다. 물론 본인도 엄청난 부자가 됐다. 같은 고향 선배인 모차르트가 카라얀의 덕을 봤다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니다. 후배 덕분에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동네 레코드가게의 쇼윈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카라얀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하는 모습 말이다. 괜스레 멋져 보인다. 조용하지만 힘과 카리스마가 넘친다. 눈을 감고서 무슨 지휘냐고 할지 모르지만 오케스트라와의 교감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이미 끝난다.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였다. 카라얀은 일찍부터 이미지의 힘을 알고 있었다.
베를린 필은 1963년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이 설계한 새로운 콘서트홀에 둥지를 트게 된다. 겉보기에는 서커스단 텐트처럼 보여서 카라얀 서커스(Zirkus Karajani)라고 불린다. 내부는 혁신 그 자체였다.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고 겹겹이 올라가는, 이른바 빈야드(vineyard) 형태인데 이후 건립된 콘서트홀의 표준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롯데콘서트홀도 빈야드 모양을 따랐다.
카라얀 서커스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기에도 좋지만 촬영하기에도 좋다. 다가올 영상시대를 예견한 카라얀이 콘서트홀 설계에 촬영이 용이하도록 요구한 결과다. 그의 예견은 1957년 베를린 필의 일본투어에서 싹텄다. 콘서트가 일본 전역에 중계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니!”
이후 카라얀은 콘서트 영상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카라얀의 영상에 대한 예지력은 죽고 나서 더 큰 빛을 발한다. 21세기 들어 인터넷 스트리밍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2009년 디지털콘서트홀의 출범을 자극했다. 베를린 필은 카라얀 이래 수십 년 동안 쌓인 영상제작 노하우를 기술에 녹여 콘서트 실황을 온라인(www.digitalconcerthall.com)에서 판매하게 된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온라인을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베를린 필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관객들의 반응도 뜨겁다. 베를린 필의 디지털콘서트홀은 한국어 버전 홈페이지의 추가로 화답했다.
지금도 우리는 음반뿐 아니라 영상을 통해 카라얀을 만난다. 죽은 지 벌써 3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가 의도한 이미지로 카라얀을 기억한다. 그는 다른 지휘자들과는 달리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에 자주 간 이유도 소니(sony)의 영상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럼 이 거장의 호기심은 어디서 왔을까? 놀랍게도 카라얀은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공과대학에 다녔다고 한다. 아, 예술적 공대생! 이것 말고, 그의 호기심을 설명할 길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