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품연지 이야기를 쓰기 위해 불국사를 다시 찾았다. 불국사는 봄에 새싹이 움트고 벚꽃이 활짝 필 때도 좋지만 가을 단풍도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화간반개(花看半開) 주음미취(飮酒飮微醉)’라고 했다. 채근담에 있는 말로 ‘꽃은 만발했을 때보다 피기 시작했을 때가 좋고, 술도 약간 취할 때가 좋다’는 것이다. 꽃과 술뿐만 아니고 단풍도 한창일 때보다는 막 옷을 바꿔 입으려는 이즈음이 더 아름답다.
일요일이라 사람들로 북적대는 것이 좀 못마땅하지만 일주문을 지나 반야교에 이르기까지 그 풍광에는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안병욱님은 ‘하루에 한번쯤은 하늘을 보자.’라고 했다. 이런 붐비는 인파가 못마땅할 때도 하늘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본다. 파란 하늘 바탕에 빨갛게 물든 단풍잎. 참 아름답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피안(彼岸)이고,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며, 극락(極樂)이다. 절 안으로 접어들자 시주한 분의 명찰을 단 국화 화분이 가득하다.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다보탑, 석가탑 주위도 온통 국화꽃이다. 그런데 ‘사찰’, ‘부처님’하면 연꽃이다. 과거 이곳 불국사에도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있었다.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 있었다는 구품연지(九品蓮池)이다.
구품연지(九品蓮池)는 동서 39.5m, 남북 25.5m 정도의 크기로 타원형 연못으로 못의 깊이는 2-3m이며 못의 안쪽은 자연석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연지(蓮池)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74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그 후 어떤 연유로 인해 연지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 나무가 심어져 이처럼 크게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구품연지에는 지금쯤 꽃이 지고 연밥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연밥은커녕 연이 자라고 있어야 할 구품연지에는 먼지만 풀풀 날고 있다.
구품연지의 수원지는 토함산 정상에서 발원한 지하수가 불국사 무설전 옹벽 아래에서 솟아나오고, 대웅전 밑으로 만들어진 물길[水口]을 따라 ‘범영루’와 ‘자하문’ 중간에 보이는 수구와 지금의 해탈교가 있는 수로를 통해 이곳 구품연지(九品蓮池)로 물을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퇴적토가 쌓이면서 연못의 규모가 축소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연못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매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72년 불국사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와당을 비롯해서 조선시대 유물까지 출토됐고, 1908년 일본에서 발행한 10전짜리 주화가 수습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품연지의 복원은 사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람 동선과 발굴지역 주변에 무성한 소나무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문제 등으로 연지의 존재와 규모만 확인하고 복원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구품연지는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줄여서 연지(蓮池)라고도 한다. 『관무량수경』에는 서방 극락정토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극락정토에는 연꽃이 피어 있는 큰 연못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보이고, 꽃들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극락정토의 성중(聲衆)들은 이 연지에 둘러앉아 설법을 듣는다”
극락을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 경전에 따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난 사람은 그 선근(善根)이나 이승에서 쌓은 공덕이나 성격이나 행위에 따라 태어나서 받는 과보는 아홉 가지[구품(九品)] 단계로 나누어진다.
구품이란 바로 극락왕생의 단계로 아홉 가지 품위가 있는데 상품·중품·하품의 각 품에 상생·중생·하생이 있어서 구품이다. 곧 상품상생(上品上生)·상품중생(上品中生)·상품하생(上品下生)·중품상생(中品上生)·중품중생(中品中生)·중품하생(中品下生)·하품상생(下品上生)·하품중생(下品中生)·하품하생(下品下生)을 말한다.
사찰 내에 이와 같이 극락세계의 상징인 구품연지를 조성하는 것은 극락정토의 성중들이 연지에서 설법을 듣는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