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果木)
-박성룡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을 회복한다.
-가을 과물(果物)의 은총 사태라니, 경악이라니! 이런 거친 말은 예기치 않은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에 붙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 말을 가지를 휘게 할 정도로 나무에 열매가 무르익은 모습에 같다 붙이니 아연 시가 살아난다. 시는 거친 일상어를 깨는 압축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이라면, 그 반대도 유효하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시인은 두 번의 감정 노출로 시의 선입견을 깬다.
“시어는 일상어에 가해진 언어적 폭력”이라는 발레리의 말이 생각난다. 어제는 고향에서 간짓대로 비취빛의 하늘 올려보며 감을 따는데, 얼마지 않아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이 내 손 안에 느껴졌다. 밭의 호박잎이며 바랭이, 다른 풀들은 누렇게 색이 바랬다. 고춧대도 이젠 앙상해졌다. 활기차게 출발했던 내 삶도 시들하기는 마찬가지. 이 멸렬의 시간에 소쿠리에 가득한 과물 때문에 내 생이 덩달아 무거워지는 체험을 하는 건 고맙고도 황송한 일이다.
과목들은 박질에 뿌리를 뻗어 땅을 경작했을 것이고, 가지는 가지대로 태풍과 뙤약볕을 견뎠을 것이다. 그 나무들이 “내가 익힌 거야 한번 먹어봐, 먹어봐”하는 속삭임에 말문이 막힌 채로 머뭇머뭇, 손을 내밀어 본다.
소출 없는 삶의 허무 때문에 시마저 잃고 저무는 조락의 계절, 다시 한번 내 시력을, 삶에 대한 깨달음을 회복시켜준 나무야, 고맙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