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남산 통일전 부근에 풍천임씨의 집성촌이 있고, 서출지로 불리는 연못 가에는 풍류를 즐기든 이요당(二樂堂)이 우뚝하다. 서남산에 살던 화계 류의건(1687~1760)은 서출지의 작은 정자를 찾아 자주 글을 남겼고, 그는 이요당이 있는 누각을 남산 연정(南山 蓮亭)이라 불렀다. 『동경잡기』「승지(勝地)」에 “이요당은 금오산의 동쪽 기슭에 있으며, 고을 사람 임적(任勣,1612~1672)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에 연못이 있고,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누정(樓亭)을 지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못에 가득 연꽃을 심었고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며, 온갖 가지의 붉은 꽃들이 마루의 기둥까지 눈부시게 빛난다(二樂堂在金鰲山東麓, 鄕人任勣所構客堂也. 前臨池湖, 築石爲階, 仍構樓亭, 登臨則宛在水中. 種蓮滿湖, 當秋盛開. 萬朶紅萼, 輝映軒楹.)”라며, 연꽃과 붉은 꽃이 가득한 못 앞에 지어진 이요당의 경치를 설명하였다.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의 사위인 풍천임씨 임적은 1665년에 누정을 짓고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이요당’이라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기문을 남겼다. -이요당 창건기(二樂堂 創建記)  내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가 30년인데, 지난 계묘년(1663) 여름부터 겨울까지 여러 달 비가 내리지 않아, 시내와 못이 말라버렸다. 우물은 조금의 물을 긷기에도 부족하고, 못은 얼마 안 되는 물조차 남은 곳이 없으며, 가정에서는 물동이를 이고 동으로 서로 분주하게 다니는 자들이 얼마인지 모를 정도였다. 나는 이곳에 우물을 뚫어, 다행히 샘을 찾았다. 온 고을의 사람들 모두가 그 혜택을 입었고, 그로 인해 못의 물이 마를까 함께 산의 돌을 옮겨다가 겹쳐 쌓아 축대를 완성하였다.  그 위에다 정사(精舍)를 지어 편하게 쉬는 장소로 삼고자, 갑진년(1664)에 비로소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겨울 혹한의 날씨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다음 해 을사년(1665) 정월 24일에 상량하였다. 이 정자가 지어진 것이 어찌 우연이었겠는가? 훗날 자손들이 도와서 영원히 보존한다면, 이 정자는 오래도록 변치 않을 것이다. 때는 을사년 정월 원우(院宇)는 없고, 강희4년(1665) 주인 임적이 쓰다. 이요당 임적은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해 우물까지 말라버려 백성들이 어려워할 때 샘을 뚫어 백성을 이롭게 하였고, 또 돌을 쌓아 물을 가두어 못을 만들고 비상용수를 확보하였다. 또 백성의 민심을 얻어 못 주변에 누정을 짓고 편하게 쉬는 장소로 삼고자 건물을 지었으니, 이것이 이요당의 건립배경이 된다. 게다가 고을의 백성들이 서로 도와 공사가 빨리 되었으니, 그의 인품을 짐작할 만하다. 실제 1636년(인조14)부터 1889년(고종26)까지 수표(水標)·기우제(祈雨祭)·기청제(祈晴祭)·기설제(祈雪祭) 등과 관련된 논의와 보고를 담고 있는 6책 분량의 『기우제등록(祈雨祭謄錄)』에 의하면, 1660년(현종1)부터 가뭄이 심하여 1661~1663·1665·1667·1668·1670년·1674년에 모두 31회의 기우제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며, 당시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1546년(명종1) 무과에 올라 남포현감(藍浦縣監:충남 보령)을 지낸 임몽서(任夢瑞)의 후손들이 경주에 살면서, 남산동에 풍천임씨 집성촌이 이뤄졌다. 증조부 임균(任匀)-조부 임사유(任四維)-부친 임이현(任以賢) 세대를 거쳐 임적은 금오산의 서출지 부근에 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훗날 아들 오봉(鼇峯) 임인중(任仁重,1645~1721)과 손자 시암(是庵) 임화세(任華世,1675~1731)가 가문의 명성을 드높였다. 동남산에 위치한 이요당은 건립 이후 많은 시인묵객이 다녀갔으며, 지역문사의 교유장소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석음재(惜陰齋) 고상변(高相變,1680~?)이 「이요당빙허루취음(二樂堂憑虛樓醉吟)」을, 활산 남용만이 「빙허루중수기(憑虛樓重修記)」 등을 지었고, 경주부윤 황경원과 치암 남경희 등도 이요당·빙허루에 관한 시를 다수 남겼다. 1736년 비바람에 훼손되어 무너진 것을, 1781·1995년 거듭 중수하였다.  임적의 아우 임극(任勀,1614~1686) 역시 배반동 능지촌에서 산수당(山水堂)을 경영하였고, 현재는 양피못 둔덕으로 이건하였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