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6호에 이어
앞에서 신라는 박혁거세가, 고구려는 주몽, 천제의 아들이 건국했다고 말한바 있다. 고전에 의하면 ‘천자는 천지신명과 천하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는 사직과 국내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도 경주에서는 신라, 역대 왕들의 제사를 능과 사당에서 지낸다.
《삼국사기》의 (제사)편을 보면 신라는 2대 남해왕 3년(AD 6년), 봄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우고 계절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22대 지증왕은 나정에 신궁을 짓고 36대 혜공왕은 5묘를 짓고 37대 선덕왕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즉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제례를 따른 것으로 본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나 말기에는 제후의 예를 따랐다. 조선초기에는 ‘우리의 선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단군이다.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므로 하늘제사를 폐지할 수 없다’고 했으나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아닌 제후국의 제사를 지내며 원구단은 폐지되고 기우제만 지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 환구단(혹은 원구단)으로 지금은 서울 조선호텔이 있는 자리다.
반면에 고구려는 〈귀신과 사직과 농업의 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구려는 흘승골성(중국 환인현, 비류수가 흐르는 오녀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AD 3년, 유리왕 22년)한 후에도 매년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동맹’이다. 즉, 농경의례로서 부족사회 전체의 추수감사제로 보고 있다. 그 대상은 고구려의 동쪽에 있는 큰 동굴에서 부여신인 ‘유화부인’과 그 아들인 ‘주몽’에게 제사를 올린 곳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옛 고구려지역 답사를 다녀왔는데 바로 중국 집안시 인근에 위치한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는 왕릉의 구조가 다르다. 신라는 돌널무덤(석관묘) →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 → 돌방무덤(석실분)으로 바뀌었고 묘실은 지상에 있다. 특히 돌무지 덧널무덤은 도굴이 불가능한 반면 돌방무덤은 합장, 즉 부부나 가족장도 가능했다. 입구에 문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구조였지만 도굴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후대로 가면서 큰 능들은 많이 도굴을 당하여 귀중한 부장품들이 많이 사라졌다. 고구려는 돌무지무덤(적석총) → 굴식장법 →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해 갔다.
즉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쌓았다. 고임식 천장(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마지막으로 큰 돌로 마무리한다)으로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특징은 내실에 벽화가 있어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중국 집안시 장천동 고분군이나 통구고분군, 북한의 평양과 황해도의 안악과 남포부근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세계적으로도 고대국가에서 이렇게 많은 고분이 한 장소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나라는 고구려뿐이다. 내부구조는 석실봉토분으로 지하에 묘실을 두었는데 방이 2개 이상인 경우도 있다. 고구려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기마인의 모습도 생생하게 보이지만 논을 갈고 밭을 가는 농경사회이기도 했다.
왕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신라의 첫 왕은 박혁거세(朴赫居世)로 ‘세상을 빛내다’라는 뜻이다. 보름달 같은 큰 알이 초가지붕에 있는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박’, ‘혁거세’는 ‘세상을 빛내다’라는 뜻이다. 거서간(혁거세왕 당대에만 사용) → 차차웅(왕이면서 제사를 지내는 제정일치사회로 본다. 2대남해왕 당대만 사용) → 이사금(尼師今)은 연륜이 높은 사람,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까지 사용) → 마립간(칸은 왕, king으로 17, 18, 19, 20, 21대왕만 사용) → 지증왕(22대 왕)부터는 ‘국왕’으로 칭했다. 신라는 마립간 시대부터 중국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는 모두 왕으로 통칭한다. 고구려왕들의 묘호는 능이 묻힌 장소나 업적를 나타낸다. 15대 미천(美川)왕은 미천강 둔덕에 장사를 지냈고 19대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요동성까지 확장하며 전성기를 일군 왕이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다. 그래서 고구려의 전성시대는 5C~6C중반까지로 19대 광개토대왕과 20대 장수왕이 재위하며 많은 성들을 쌓아 승리를 이어나갔던 고구려는 드넓은 만주를 주름잡았다. 이번에 다녀온 중국 심양과 집안등에서 드넓은 평원과 풍부한 물과 보며 그 옛날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