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영덕에서 경주로 세거한 우암 남구명(南九明)의 후손으로,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이 그의 부친이고 어머니는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의 따님이다. 1777년 진사에 올라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간원정언 등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44세 되던 해(1791)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경주로 돌아와 보문동의 동쪽인 암곡동(暗谷洞)에 지연정사(止淵精舍)를 짓고, 학문을 궁구하고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1860년 아들 남기양(南驥陽)이 12권 6책의 『치암집』을 편찬하였고, 외손 이종상(李鍾祥,보문정사 배향)이 발문을 적었다.
현재 보문단지에서 동쪽으로 토함산을 오르다 보면 좌측으로 1975년에 건립된 덕동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 이곳엔 황룡에서 흘러오는 물과 암곡에서 굽이치는 두 물줄기가 만나는 덕동(德洞)마을이 있었고, 북쪽 암곡 상류쪽으로 오르면서 덕동-명실-시래골-큰마을-계정-큰기왓골-와동-왕산 등 여러 마을이 분포한다. 특히 계정에는 치암의 지연정이 있었으나, 댐 건설로 상류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에 이건(지연정사, 보덕로 275-5)하였고, 덕동을 비롯한 수몰민 역시 주변으로 흩어지거나, 가까운 산등성이로 옮겨가 살았다.
치암은 1791년 암곡동에 자리하면서 덕동의 아름다운 산수를 즐겼으며, 지역의 교화에도 애썼다. 이후 1804년 명실동에 대한 자치회를 둘 것을 제안하며, 백성이 착하고 덕이 있는 마을의 덕동을 가꾸려고 노력하였다. 송나라 여대충(呂大忠)·대방(大防)·대균(大鈞)·대림(大臨) 4형제는 장재(張載)와 정이(程頤)에게 도학을 배웠고, 『여씨향약』을 지었다. 조선에 주자학이 성행하면서 여씨향약이 알려지고,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향약이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후 지방의 실정에 맞게 보완되면서 여러 향약이 등장하게 되는데, 경주도 유림과 향촌세력을 중심으로 향약이 가속화되었다. 명곡은 암곡의 반대되는 표현으로 화봉괘정산(불벵이산:260여m)에 불을 놓으면 괘정산 뒤쪽은 어두워 암곡(暗谷)이라 하고, 앞쪽은 밝아 명실(明室)이라 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명곡동안기(明谷洞案記)는 경주의 마을형성과 향약연구 및 향촌지배세력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글에 등장하는 경약(敬若)과 사희(士希,淵巖 南景愚,1762~1837)는 집안사람으로 보이며, 근암 최옥(1762~1840)이 지은 「만남사희(輓南士希)」에서 치암과 사희의 관계를 언급했다. 이들이 치암에게 보세장민에 대해 묻고, 치암은 장재의 정전제와 여씨향약을 거론하며, 백성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선비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명곡동안을 작성하였다.
장재(張載)는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 다스림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니, 빈부가 균등하지 못하며 교양함에 법도가 없으면 비록 정치의 도를 말하고자 하더라도 모두 구차할 뿐이다” 또 “대처함에 방법이 있게 하여 몇 년을 기한으로 삼는다면, 옛 제도를 회복할 수 있다”며 정전제의 개혁으로 어진 정치를 하고자 제안하였다.-명곡동안기(明谷洞案記) 갑자년(1804) 여름 6월 3일, 명곡동의 동안(洞案)이 완성되었고, 동안의 인원은 다섯 사람이다. 명곡동은 옛날에는 양반의 가계가 없다가, 남씨·최씨 두 성씨가 처음 와서 거주하였고, 산지가 혹은 20여 년 혹은 10여 년 되기 때문에 다섯 사람에 그쳤다. 경약(敬若)과 사희(士希)가 일찍이 나에게 “선비는 어려서부터 독서하고 혈구지도(絜矩之道)를 배우면서 어찌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돕고자[輔世長民] 하지 않는 겁니까?”하기에, 나는 “힘이 미치지 못해서이다. 힘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체용의 학문이 아니다. 횡거선생[장재(張載,1020~1077)]이 밭을 사서 우물 정자로 획을 긋고(정전법:買田一方 畵爲數井), 여씨향약을 하고자한 것은 모두가 이러한 뜻이다.
우리들이 비록 촌구석에 살지만 진실로 이것에 힘쓴다면 오히려 한 마을의 백성 수에는 미칠 것이니, 이 역시 보세장민(輔世長民)이라 말할만하다. 여기서 하지 않는다면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에 가까울 것이니, 우리들이 어찌 조금도 그것에 뜻을 두지 않겠는가?”했다.
마침내 내가 마을의 일을 아는 것을 미뤄서 향약을 간략히 모방하고 절목을 지었으니, 풍속의 교화 가운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마음이 소민(小民:백성)을 위함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이 서로 갈고닦아 힘쓰는 방도에 달려있으며, 백성은 날마다 힘쓰지만, 기미가 옮겨 다님과 시행하고 조치하는 책임을 알지 못하니, 실제는 우리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명을 나열해 적어 명곡동안을 만들고, 그 말미에 절목을 이어서 적어 후인들에게 보여주어 (향약의 규칙을) 무너뜨리지 말도록 한다. 경약은 그 사안을 알아 이미 완성하였고, 나(치암)는 책 끝부분에 그 일을 설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