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유람목적으로 두루 유람하며 당시 경주 사실적으로 서술해
18세기 옥산, 양좌동은 문사들의 필수 여정박종의 ‘신라십무(新羅十舞)’ 활용해야
이번호에서는 ‘조선시대 경주 지역 유기(遊記), 총체적 집성된 19편 (上)편’에 이어 몇몇 중요 작가와 시기별 유람배경, 여정, 글쓰기 방식 등에 대해 들여다보았다. 역시 오상욱 경북고전번역연구원 원장(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사)의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遊記의 특징 고찰(동방한문학회 제71집)’과 인터뷰를 통해 구성했다. 다음호 (下)편에선, 경주유기 연구에 대한 가치를 조명해보고 관련전문가를 통해 유기에 담긴 자료로서의 활용에 대해 구체적인 자문을 구할 예정이다.
-저마다 다른 유객의 입장에서 다양한 유람배경으로 경주 찾았고 경주문인으로서 고향 경주를 구석구석 유람한 경우도 상당수 유람기는 작가의 사적인 글이지만 타인을 위한 공적인 기능도 담겨있었다. 공적 또는 사적인 일로 경주를 찾은 이들은 조선후기로 들면서 작가의 주도하에 의도적이며 자발적인 유람이 증가한다. 이는 유기문학의 성장과 연관이 있으며 경주유기 역시 같은 현상을 보였다.
박종의 경우 외손의 입장으로 경주를 찾았으며 허강은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부인의 고향 양좌동을 찾았고 홍성민, 이덕홍, 심원열, 김수흥은 관직의 공무로 경주를 찾았다. 또 송달수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서원을 찾아 도통연원(道統淵源)을 확인하는 계기로 경주를 찾는 등 저마다 다른 유객의 입장에서 다양한 유람배경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 반면, 이덕표, 이공상, 이봉수 등과 같이 경주문인으로서 고향 경주를 구석구석 유람한 경우도 상당수 포함되어있다. 이외에도 이정엄(1755~1831)의 남려유고(南廬遺稿) 권3, 잡기에는 다수의 유기가 실려 있는데, 고향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함께 회재의 후손으로서 애향심과 스승의 공경과 조상의 참배 등에 의미를 둔 것은 주목할 점이다.
“1580년의 홍성민, 이덕홍과 1767년의 임필대, 박종과 1857년의 송달수, 심원열 등은 서로 같은 해 그리고 비슷한 경로를 통해 경주유람을 다녀간 이들로서 이들 유기는 당시 경주지역의 상황과 유기서술방식 등을 비교 연구하는데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19편의 경주유기 가운데 18세기에 저술된 이만부의 동도잡록(東都雜錄), 김상정의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임필대의 유동도록(遊東都錄), 박종의 동경유록(東京遊錄), 박이곤의 유동경록(遊東京錄), 심원열의 경주고도기(慶州古都記) 등은 경주, 동도, 동경 등 다양한 제명으로 경주를 직접 언급한 작품이면서 다른 작품과 달리 경유지로서 경주가 아니라 경주를 직접적인 유람지로 삼았고 자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담은 유기서술의 특징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오 원장은 작가의 인물배경, 유람정보 및 특징과 기본적으로 무엇을, 왜 봤는지에 대해 몇 명의 대표적 작가로서 예를 들어 설명했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 월성 설명을 시작으로 최치원에 대한 고사와 유적지 등에 대해 설명 식산 이만부는 퇴계학을 익힌 유학자로 가학으로 학문을 배웠고 서울 태생이다. 젊어서는 전국을 유람하고 상주로 이거해 산림처사로 살면서 후진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쓴 인물이다. 무려 173편의 방대한 유기 가운데 경주와 관련된 유기만 따로 수록하기도 했다.
오 원장은 “이만부는 언양의 반구대가 세워지고 구곡문화가 만들어질 즈음 다녀갑니다. 식산은 구곡을 지정하고 그 영향은 경주까지 미치게 돼 경주 문화에 크게 일조한 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만부의 동도잡록(東都雜錄)은 숙종년간에 저술된 유기로 월성과 곳곳의 유적에 대해 설명을 곁들여 감상기행문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했으며 유기형식을 취한 해설적 유기작품으로 이해된다. 동경에 대한 잡다한 기록을 일정별 서술이 아니라 항목별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설명을 하고 있다. 월성 설명을 시작으로 마지막에는 최치원에 대한 고사와 유적지 등에 대해 설명하는 등 글 배치에 따른 여정소개를 했다.-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 1722~1788), 숭덕전, 남문루, 종각, 봉황대 등 경주 구석구석 유람 석당은 승지와 대사간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시파와 벽파로 나뉜 정국에 정조와 사이가 나빴던 벽파의 홍인한과 가까웠던 이유로 파직된다. 이후 노론의 인물로 향리에 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김상정의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는 영조년간 1760년 저술된 유기로 합천-밀양-양산-언양을 거쳐 경주 부윤 정존겸을 찾아가 달성-합천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다.
총 12일 여정 가운데 3일간 경주에 머물면서 유람 내내 경주부윤 등 여러 문인들과도 교유하고 숭덕전, 남문루, 종각, 봉황대 등 경주의 구석구석을 유람했다. 출발과 도착 그리고 중요 일정에 대해서만 일정을 별도로 표기한 것이 특징이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 1709~1773), 경주에 머문 기간 가장 길며 둘러본 장소 역시 상대적으로 많아 임필대는 경북 의성군에 거주했고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보여 과거시험에 합격됐으나 취소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이후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문중과 향촌 교화에 주력했다. 유동도록(遊東都錄)을 보면 거의 경주 곳곳을 유람했다. 임필대의 경우 경주에 머문 기간이 가장 길며 둘러본 장소 역시 상대적으로 많았다. 아마도 계획적으로 여유를 갖고 구석구석 유람한 것으로 보인다.
유동도록은 1767년 영천-건천-경주-언양-울산-감포-경주-옥산-영천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의 유기로 총 46일 여정 가운데 27일간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시내, 남산 일대, 양동, 불국사, 감포 등 넓은 지역을 유람하고 유람 내내 많은 문인들과 교유했다. 동선을 따라 여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특히 경주읍성의 건축물 남문루, 향사당, 집경전지, 논호수(현재 황성공원) 등 자잘한 유적들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당주(鐺洲) 박종(朴琮, 1735~1793), 동경유록의 ‘신라십무(新羅十舞)’는 현재로선 최초의 기록, 신라십무를 경주유기에서 발굴해낸 것은 한문 번역의 ’쾌거‘ 박종은 특히, 경주에 대해 의미있고 중요한 글을 남긴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스승인 홍계희와 함께 홍계희의 아들인 당시 경주 부윤 홍술해를 찾아 경주를 다녀갔다. 박종은 관북유학자로 관북유학의 부흥에 힘썼으며 평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전형적인 처사였다. 주자학을 배우고 예학을 실천하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지향하는 관북의 선비였다. 영해에 살면서 영남학을 접하고 많은 영남의 문인들과 교유한다.
박종의 동경유록(東京遊錄)은 임필대와 같은 시기인 1767년 관동팔경-경주-옥산-칠곡-문경-충청도 안보-충주-경기도 양주로 돌아가는 장거리 여정의 유기로 총 91일 여정 가운데 39일간 경주에 머문 기록이다. 경주일대의 유적과 인산서원, 옥산서원 등을 참배했다.
특히, 박종은 홍계희, 홍술해와 함께 당시 경주 동헌에서의 연희에 참석해 ‘신라십무(新羅十舞)’라는 전통춤을 관람하게 된다. 박종은 이 열 가지 신라의 춤동작을 동경유록에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둔다. 오상욱 원장은 ‘당주 박종의 동경유록 연구(동양한문학연구 2016)’에서 초무(初舞), 아박무(牙拍舞), 향발무(響鈸舞), 무동무(舞童舞), 처용무(處容舞), 정자(釘子), 반도무(蟠桃舞), 주무(舟舞), 포구락무(抛毬樂舞), 황창무(黃昌舞), 마지막에서는 학춤으로 끝을 내는 신라십무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번역하고 발견해냈다. 이렇듯, 신라십무라는 콘텐츠를 경주유기에서 발굴해낸 것은 ‘한문 번역의 쾌거’라 아니 할 수 없다.
오 원장은 “조선에 이르면서 오랜 변화를 겪고 재정비되면서 성대한 신라의 음악과 춤 원형은 사라져버렸는데, 박종의 신라십무에 관한 기록은 현재로선 최초의 기록입니다. 18세기 박종이 바라본 신라십무의 기록을 통해 신라의 춤과 공연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이것이 문화콘텐츠에 활용, 개발되길 바랍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종은 일정별과 항목별 서술에 사실적 묘사를 더한 빼어난 글쓰기 방식으로 유기를 서술했다. 특히 18세기의 대표적인 유람가로 산수벽이 있어 팔도를 유람하며 많은 유록을 남겼으며 저서인 당주집(鐺洲集, 권14·15)에는 동경유록을 포함한 다수의 유록이 수록돼 있다. 평소 경주에 대한 마음이 늘 자리했으며 유람이 주목적이면서도 박혁거세의 시조묘를 참배하고 옥산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찾았다. 또 인산서원을 찾아 함경도의 학문적 연원과 스승의 발자취를 탐색했다.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1730~1783), 옥산서원, 구강서원 등 참배하며 유학자로 정체성 확보하는 도통연원 확인하는데 집중 박이곤은 퇴계학파다. 영덕에서 살았고 향시에는 여러 번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실패해 뜻을 접고 향리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유동경록(遊東京錄)은 1773년 대구-하양-영천-옥산-사방-경주-안강-영천-하양-대구로 되돌아오는 여정의 유기로 총 17일 여정 가운데 7일간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시내 및 옥산서원, 분황사, 호림 등을 유람하고 영양, 옥산, 영천, 고령의 많은 문인들과 교유했다. 다른 일기체 형식의 유기에 비해 내용이 매우 간략하지만 일정별 서술로 감흥은 되도록 배제하고 유람한 지역의 정보와 경유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오 원장은 “유동경록은 경주유람배경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경주로 오가는 길에 시조묘를 참배하고 옥산서원, 구강서원, 임고서원, 명고서원 등 서원 4곳을 참배하면서 유학자로 학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도통연원을 확인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서원 탐방하러 온 이였으니까요”라면서 유기 서술방식은 기존 기행문학의 장점만을 활용한 다양한 서술방식으로 독창적이면서 이해력 높은 글을 완성했다고 설명했다.-경주지역 유기의 전체여정과 중심 유람지...사방으로 난 길 통해 경주로 드나들면서 곳곳의 명승지와 유적 탐방 경주는 사방에 통로가 형성되어 어느 곳으로 오고가더라도 유적과 명소를 충분히 관람할 수 있었으며 유객은 자신의 출발지와 종착지를 중심으로 경주를 찾아 유람했다. 특히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불국사, 감포, 대왕암 등을, 서쪽으로는 선도산, 김유신장군묘 등을, 남쪽으로는 남산, 포석정, 인산서원, 용산서원 등을, 북쪽으로는 논호수, 백률사, 안강, 양좌동, 옥산 등을 두루 유람한 것이다. 18세기를 전후로 경주 여정의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나는데, 바로 옥산이 명소로 등장하면서부터다.
옥산서원은 경주를 유람하며 들르는 필수 여정의 하나로 문사들의 필수 유람지가 되었다. 회재의 고향인 양좌동 역시 문인들 회합의 장소로 유객이 경주를 찾으면 들르는 중요한 장소였다. 전국의 유객들은 사방으로 난 길을 통해 경주로 드나들면서 곳곳의 명승지와 유적들을 탐방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