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보다도 뜨거운 여름이다. 숨이 막힐 듯 태양과 마주하는 하루하루가 길기만 한 여름 낮밤은 그대로 열탕이다.  그런 와중에 나는 고구려, 만주, 심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만행아래 독립을 향한 수많은 영혼들이 별이 되어버린 회한의 땅이다.  혹한의 겨울을 가진 만주, 철없는 나는 드넓은 그 곳에서 여름을 낚으리라 여겼건만... 하루도 빠짐없이 푸르른 하늘아래 흘렸던 뜨거운 땀, 이보다 앞서 까마득한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공존하던, 지금의 대한민국의 뿌리가 용틀임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를 벗어나 만주 땅까지 기상을 떨치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 고구려가 대륙을 호령하던 현장이다. 천년국가 신라의 서울, 경주에 나는 또 다른 둥지를 틀었다.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신라인들의 숨길과 흔적위에서 나는 현재를 살고 있다. 발길 닿는 어느 곳이라도 선조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그 중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로 말을 타고 초원을 순환하며 살던 유목민인 반면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으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만주들판을 호령하던 수렵민으로 볼 수 있다. 혁거세는 말이 품고 온 알에서 태어나 신라를 건국했다. 자라면서 아주 총기가 있고 기상이 빼어난 것을 보고 기존에 있던 육부촌의 촌장들은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왕으로 추대하 신라는 첫 발을 내디뎠다. 한반도는 늦은 가을이면 오리와 기러기가 따뜻한 남쪽인 한반도로 날아와 강 하류나 저수지에서 군무를 펼치고 짝짓기를 하여 알을 낳고 새끼를 깐다. 이듬해 봄, 3월이 채 가기도 전에 어미는 다자란 새끼들을 데리고 북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과 조상들이 계신 곳에서 왔을까? 한반도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에는 새 모양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혁거세, 신라의 시조는 어디서 왔을까?’는 고고학자들에게 아주 오래된 주제다. 알타이 산이 있는 중앙아시아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를 부모로 태어난 천제의 자손이다.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추모(鄒牟)와 중해(衆解)로도 부른다〕으로 까마득한 시절, 드넓은 만주의 북쪽, 지금의 하얼빈근처에는 고대의 부여가 있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주몽의 이력은 차이가 별로 없다. 잠깐 살펴보면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산천에 기도하여 금빛 개구리를 닮은 아이를 얻어 ‘금와(金蛙)’라 이름을 짓고 태자로 삼았다. 이후 왕은 땅이 기름지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가 나라를 순행하다 태백산 남쪽 우발수(묘향산 만폭동 단군대 샘터)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부모의 허락없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인연을 맺은 까닭에 귀양 온 ‘유화’로 하백(河伯, 황하의 신)의 딸이었다.  그 말을 들은 ‘금와’가 ‘유화’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가니 햇빛이 그녀를 따라가며 비추었다. 이로 인해 태기가 있어 닷 되나 되는 ‘알’을 낳았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바로 ‘주몽’으로 드넓은 평원에서 활을 귀신같이 쏘던 신궁이었다.  그 전에 북부여에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 ‘해모수’라며 도읍을 정했다. 그 후 오이, 마리, 협보 3명의 동지와 뜻을 같이 해 오녀산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