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난 배가 기습적으로 부산에 닿고, 동래성이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아 경주읍성도 왜놈들에게 장악당한다. 임진왜란 발발(勃發) 그해 6월 9일, 경주부를 중심으로 영천·자인·흥해·울산 등 130여명의 의병장을 모아 긴급 논의에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문천회맹(蚊川會盟)이 결성되고, 9월에 경주읍성 탈환작전을 개시해 큰 공을 세운다.  임란 초기 관군의 무능함은 의병장과 백성의 동참을 이끌었고, 300여 명이 넘는 의병장과 경주부의 양반들 역시 목숨을 걸고 국가와 가문을 위해 싸웠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진 내남의 잠와 최진립과 옥동(玉洞)·기별(奇別), 북안의 백암 김응택과 천죽(千竹), 건천의 부암 백이소와 부기(富基) 등 충노 이야기 역시 지역의 미담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임란창의 모범적 사례는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도 충노의 미담은 망설임 없이 등장하는데, 바로 손종로와 충노 억부(億夫) 이야기가 그 주인공이다. 양동마을의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1598~1636)는 임진왜란 시기에 태어나 전쟁의 참상을 보며 자랐고, 1618년(광해10) 무과에 합격해 남포현감(藍浦縣監:충남 보령)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의 쌍령(雙嶺)전투에서 충노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만으로 장례를 지냈다. 저서로 『낙선당실기(樂善堂實紀)』가 전한다. 그의 가계를 보면, 손소(孫昭)-손중돈(孫仲暾)-손경(孫曔)-손광서(孫光曙)-부친 손시(孫時)-손종로, 점필재의 절친인 손소와 회재의 스승인 손중돈의 후손으로 월성손씨의 정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당시 노비 2명이 주인과 함께하였으나, 억부는 주인을 따라 죽고, 살아남은 무명의 노비는 박홍원과 돌아와 전장의 일을 상세히 전하였다. 또한 손종로가 사지(死地)를 향해 떠날 때 더없이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어머니 일직손씨(一直孫氏)였으며, 덕분에 그의 충절은 대대로 회자되고, 충노 억부이야기 역시 『승정원일기』에 기록되면서 지역의 미담으로 확대된다.  1783년(정조7)에 정조께서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 旌忠碑閣)을 정려하였고, 정려비명은 양한당(養閒堂) 이정규(李鼎揆,1735~1810)가 짓고, 글씨는 정충필(鄭忠弼)이 썼다. 또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충신증훈련원정손공묘갈명(忠臣贈訓鍊院正孫公墓碣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증훈련원정손공종로정려기(贈訓鍊院正孫公宗老旌閭記)」등을 지었다. 이후 1816년(순조16) 손종로(孫宗老)의 충절에 대해 추증을 더하고, 1867년(고종4) 손종로와 억부의 일을 추증하고 정려하였다.●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손종로정려기(孫宗老旌閭記)」 『동경지』에 “전 현감 손종로는 쌍령전투에서 전사하였다”를 보는데, 나는(홍양호) 송구하고 경탄하며 “어찌하여 손씨 가운데 어진 자가 많은가?”라 말하였다. 그리하여 현감의 후손을 찾아 유사를 얻어서 읽었다. 공은 월성군 손순(孫順)의 현손으로, 병자호란을 당해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 때 국난을 듣고 분격하여 “집안이 대대로 임금의 은혜를 받았거늘, 어찌 죽음으로 보답하지 않겠는가?”하고는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칼을 차고 서쪽으로 떠났다.  이때 향인(鄕人) 신상뢰와 박홍원이 따랐다.… 박홍원이 급히 소매를 당기며 함께 달아나길 청하며 “헛되이 죽기 싫으니, 살아남은 후에 일을 도모하자”하니, 손종로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꾸짖으며 “임금의 부름에 급히 달려갈 뿐 어찌 죽음을 피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힘써 싸우다 죽었다. 노비 억부(億夫) 역시 달아나지 않고 주인과 함께 죽었으니, 정축년(1637) 정월 3일이다.… 손종로는 노비와 함께 순국하였으니, 그 절개가 우뚝하며, 당(唐)나라 안고경(顔杲卿)의 일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일을 예조에 보고하고, 예관이 의논하길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었고, 노비는 주인을 위해 죽었습니다. 법에 따라 마땅히 모두 정려를 세워야 합니다.”라 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였다. 이정구(李鼎九)가 일찍이 내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자못 일의 본말을 갖추어서 작설(綽楔:홍살문)에 기록할 것을 청하였다. (見東京誌曰, 前縣監孫宗老死於雙嶺之戰. 良浩竦然驚歎曰, 是何孫氏之多賢也. 因求縣監後孫, 得遺事而讀之. 公月城君之玄孫也, 當仁廟丙子, 罷官家居, 聞國難, 奮曰, 家世受國恩, 豈不以死報耶. 卽率家僮, 杖劒而西, 鄕人辛商賚·朴弘遠從之.… 朴弘遠急引公袖, 請與偕走曰, 無徒死, 以圖後效. 公張目叱曰, 赴君之急, 寧避死耶. 遂力戰而死. 奴億夫, 亦不肯去而死焉, 卽丁丑正月三日也.… 孫宗老與其奴立殣, 其節卓卓, 不愧杲卿. 事下禮曹, 禮官議曰, 臣死於君, 奴死於主, 法當幷旌其閭. 敎曰, 可. 鼎九以良浩曾莅其地, 頗悉本末, 請記于綽楔.)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