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500여 년간 경주에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이들은 계림(鷄林), 동경(東京), 경주(慶州), 동도(東都), 남유(南遊), 동유(東遊) 등 다양한 제명으로 경주에 대해 많은 유기(遊記)작품을 남겼다. 조선시대(1392년~1910년, 518년간 27대 조선왕조기간)에 기록된 경주지역을 다룬 유기작품을 조사, 번역하고 연구한 이가 있다.
오상욱 경북고전번역연구원 원장(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사)은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遊記의 특징 고찰(동방한문학회 제71집)’을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7편의 유기를 바탕으로 경주지역 유기 19편을 발굴해냈으며, 이는 3년여에 걸쳐 오 원장이 철저히 연구 고증한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경주유기에 대한 선행연구가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특정 유기작품을 다룬 연구와 단편적 유기자료집 논문 등 자료발굴과 국역에 대한 성과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경주 지역 유람기를 총체적으로 집성한 것은 오 원장의 작업이 처음이며, 이번 경주 유기 집성으로 향후 경주 유기가 더 수집될 것으로 보인다. ‘시골학자’가 힘들게 고군분투한 결과물 중 하나인 것이다. 이는 경주에서 ‘조선’을 더욱 알리려한다면 경주시의 지원과 관심이 동반돼야 하는 대목이다. 지원에 힘입어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연구가 차제에 진행되길 바라본다.
이번호 상편에서는 경주지역 유기에 대한 개괄적 특징과 의미를 짚어보고, 중편에서는 중요 작가와 시기별 유람배경, 여정, 글쓰기 방식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하편에서는 명백히 기록으로 남겨진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유기인만큼 이러한 연구에 대한 가치를 조명해보고 관련전문가를 통해 유기에 담긴 자료로서의 활용에 대한 구체적인 자문을 구할 예정이다.
연재될 3편 모두 오상욱 원장과의 인터뷰와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遊記의 특징 고찰(동방한문학회 제71집, 오상욱)’에서 인용하고 발췌하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한다.
-조선시대(518년간 27대 조선왕조기간) 경주지역 유람과 기록을 주제로 경주지역 유기 19편 연구 오 원장은 경주를 대상으로 자료 수집, 번역, 연구까지 경주 문화에 접근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유기에 접근했다.
“재밌게 번역했고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치입니다. 경주지역 유기의 단일연구로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기록을 주제로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니 경주지역 유기 19편을 연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연구에서 선진연구자들이 도출한 유기의 일반적인 특징 외에 여정, 유람양상 가운데 공간인식 측면에서 접근해 이들 유기가 갖는 특징과 의의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자료선정 기준은 조선시대(1392년~1910년, 518년간 27대 조선왕조기간)에 기록된 경주지역을 다룬 유기작품 가운데 작가와 경주의 연관성 및 계림(鷄林), 동경(東京), 경주(慶州), 동도(東都), 금성(金城), 신라(新羅) 등 제명이 경주와 연관이 있는 유기작품을 선별했습니다”
-유객(遊客)들은 경주 유람 통해 감탄 거듭, 다양한 제명으로 유기작품 남겨 경주는 울산, 언양, 포항, 영천 등 빼어난 자연환경과 문화공간에 인접해 있으면서 예로부터 여러 시대를 걸쳐 많은 문인들이 찾는 대표적 명승지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 천년의 수도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명성에 걸맞는 고장이며 조선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빼어난 문화유적 보물창고로 조선시대의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다.
유객(遊客)들은 경주 유람을 통해 감탄을 거듭하였는데 산재한 사찰과 암자에서는 융성한 불교문화를, 여러 서원 등 유학의 근원지를 찾아서는 문인으로서 입지와 정체성을 확립했다. 또한 월성과 첨성대 등을 중심으로 사방에 이어진 문화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제명으로 경주에 대해 많은 유기작품을 남겼고 유객들은 앞서 유람자의 길을 답습하며 보편적 유람의 장소로 경주를 알리게 된다. 게다가 이는 훗날 유객의 효율적인 유람을 마련하는 ‘와유(臥遊)’로 일컬어지면서 경주라는 공간이 다양한 요구를 충족해주었다. 특히 17~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전보다 다양한 글쓰기 방식을 갖춘 다수의 유기가 경주지역 유기저술로도 표현된다.
즉, 경주라는 동일한 목적지에 대해 ‘천년고도’와 ‘도통연원(道統淵源)’과 ‘불국사’라는 이전의 한정적 유람배경과는 다른 유람배경과 다양한 공간 등이 인식되기 시작했고 자발적이고도 의도적인 유람을 통해 다양한 형식을 갖춘 유기가 저술되기에 이른다.
-주관적으로 서술된 유기이지만 내용에서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경주 보려고 노력... 기행문 형식의 산문체로, 때로는 시로 감흥 표현 19인의 작가 모두는 많은 유기를 남길 정도로 산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서로가 각기 다른 유람 배경을 안고 경주로 유람을 떠났다. 이들이 유람중 보고 들은 것들은 경주를 대변할 만한 것이었고 주관적으로 서술된 유기이지만 내용에서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경주를 보려고 노력했다. 유객들은 산수의 수려함을 기행문 형식의 산문체로, 때로는 시로 당시의 감흥을 표현했다. 이것이 유기문학이다.
그러나 경주지역 유기는 다른 산수유기와 달리, 금강산, 백두산, 지리산처럼 유람을 전제로 한 단일 주제 제명의 유기문학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먼저 작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홍성민(洪聖民), 이덕홍(李德弘), 임필대(任必大), 박종(朴琮) 등 대다수가 경주지역 외 인물로, 외부인의 입장에서 경주를 들여다보았다. 이들이 경주를 찾은 이유는 대부분 관직 또는 친지와 벗, 혼인관계 등의 인연으로 경주를 다녀갔으며 반면에 이덕표(李德標), 이공상(李公祥), 이태수(李泰壽) 등은 경주문인으로 고향 경주를 구석구석 유람했다.
경주 유람의 여정은 시가지 유적중심, 불국사와 동해안 중심, 시가지와 옥산, 경유지로의 경주 등으로 구분된다. 경주유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국사를 찾아 경내를 둘러보고 옥산서원에 들러 회재와 그의 후손들을 만났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으며, 단지 유객이 의도한 방향대로 여정이 형성되었다. 즉 유객의 출발지점에 따라 경주로 드나드는 지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당연히 보고들은 것도 다르게 나타났다. -주로 18, 19세기에 집중 저술, ‘기(記)’ 5편과 ‘록(錄)’ 14편으로 유기와 유록으로 기록 한편, 경주를 유람한 시기는 봄, 가을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여름과 겨울 순이었다. 경주에 머문 기간은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39일에 이르며 유람배경과 목적에 따라 기간이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저술시기는 16세기 2편, 17세기 1편, 18세기 7편, 19세기 7편, 20세기 2편으로 주로 18, 19세기에 집중 저술됐다.
오 원장은 “특히 홍성민(洪聖民)과 이덕홍(李德弘)은 1580년으로 저술시기가 가장 빠른데, 조선전기의 유기문학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경주를 계림과 동경 등으로 직접 언급한 것도 인상적이고요. 이후 17세기를 지나 18, 19세기 이르면서 상당수의 유기작품이 저술됩니다”라고 했다. 유기의 제명은 계림(鷄林), 동경(東京), 경주(慶州), 동도(東都), 남유(南遊), 동유(東遊) 등으로 경주를 표현했으며 ‘기(記)’ 5편과 ‘록(錄)’ 14편 등의 형식을 빌려 유기와 유록으로 유람을 기록했다.
유람 하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산문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며 간혹 이공상의 ‘남정록(南征錄)’처럼 한시형식으로 구성된 기행문과 유징문의 남유록(南遊錄)처럼 산문과 한시 형식을 모두 취한 경우도 있었다.
-경주유기... 단순 유람기록 넘어 문화, 학술, 예술적 사료로도 소중한 가치와 의의 지녀 오 원장은 유객 대부분은 경주지역 유람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았고 찬란했던 신라의 문화를 표현했다고 했다.
“작자들 자신이 원해서 유람차 경주를 찾았기에 찬양이 대부분이었겠죠. 따라서 유기 내용이 유사하고 비판의 대목은 없는 편이지요. 경주를 소재로 한 유기는 경주 전역에 산재해 있는 문화와 유적에 대한 당시의 위치정보와 외형 등 상세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문화재 복원과 보존에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 경유한 곳을 지나치리만큼 상세히 기록해두어 옛길 복원의 스토리텔링 작업에도 일조할 수 있고요. 예를 들면 벽촌의 외지고 작은 유적인 ‘명고서원’도 기록 덕분에 현존 문화재 파악에 도움을 얻었습니다. 당시 보고 들은 것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이죠. ‘신라십무’와 ‘황창무’ 등 옛 춤공연 문화를 복원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만부는 ‘동경잡록’에서 신라 때 행해진 처용무와 황창무를 확인하는가하면, 박종은 ‘동경유록’에서 신라에서 잊혀진 신라의 춤 열가지인 신라십무를 보고 아주 상세히 기록합니다. 이는 오늘날 경주 예인들이 복원할만한 사료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죠. 또 불국사, 인산서원, 정혜사 등 지방문화 발굴과 존재확인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박이곤은 ‘유동경록’에서 경주 인근 지역 간의 지명과 주점 위치정보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옛길 복원에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등 활용에도 중요한 근거로 역할할 수 있는 기록들입니다”
이렇듯 유기는 내적으로 자신의 단순 유람기록을 남기는 수준을 넘어 외적으로 문화사적, 학술적, 예술적 사료로도 소중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