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발에다 푸른 바다색 패디큐어(pedicure)를 하는 걸 보니 조만간 일이 벌어지겠다 싶었다. 역시 내 추측은 정확했다. 체중 감량용 밀크셰이크 같은 걸 두 손 가득 사오더니 그걸 마시기 시작했다.
옷장을 다 뒤져 겨우 찾아낸 수영복, 작년에 산 걸 힘들게 입어보더니 더 힘들게 벗고 있다. ‘그래 이 모습은 작년에도 본 것 그대로야’ 아내는 여름만 되면 이런 증상(?)을 보이곤 했다. 여자와 여름은 뭔가 깊은 상관관계라도 있는 게 분명하다.
물에 한 번 들어가지 않으면서 수영복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또 저런 다이어트 셰이크를 먹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며칠 안 지났는데 “딸기 맛은 이제 질리는데 초콜릿 맛을 주문해야겠지” 하고 고민하는 듯하다.
그 앞에서 물김치에 풍덩 하고 밥을 말았더니 와이프는 셰이크 통을 옆으로 살짝 밀친다.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쥐어줬더니 허겁지겁 몇 숟갈 뜨고는 아픈 머리가 신기하게도 다 나았단다. 에어컨 바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배가 고플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늘 표현해 왔던 아내를 아는지라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으로 만족이 안 되었던지 냉장고를 열더니 아이스크림 콘 하나를 입에 문다. 각진 내 눈을 천연덕스레 피하면서 나를 지나친다. 뒤통수에다 대고 “괜한 다이어트 한다고 힘들이지 말고 덥고 기운도 없을 텐데 그냥 밥 먹자!” 해봤지만 반응이 없다.
음식은 우리에게 있어 연료와 같다. 몸에 에너지가 필요할 때 우리는 음식을 찾게 된다. 그럼 반대로 에너지가 필요 없으면, 다시 말해 배가 부르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다. 몸에 들어오는 에너지 량과 식욕을 조절하는 기관은 위가 아니라 뇌(腦)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들어오면 위는 팽창하기 시작한다. 슬슬 배가 차오르면 위 신경은 식욕을 억제하고 그만 먹으라고 뇌에다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예상하다시피 우리 뇌는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다. 와이프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밥 대신 마시는 체중감량 셰이크 류는 그래서 효과가 크지 않다.
다이어트 제품이 고밀도의 성분이 들어있어 위를 빠르게 팽창시켜 ‘배부르다’는 신호를 뇌에 전달하지만, 문제는 이걸 마신 지 20분도 안 되어 다시 허기를 느낀다는 점이다. 배가 부르다고 위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뇌가 그 사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 에너지를 섭취하는 본능적인 행위에 심리적인 부분이 개입되는 순간이다.
배가 부른 아내는 소파에 비스듬히 불편하게 기대있지만 얼굴만은 행복해 보인다. 이러한 부조화 현상 이면에는 식사 후 집어든 아이스크림만이 전해줄 수 있는 보상(compensation)이 깔려 있다. 비록 유혹에 굴복 당했지만 음식으로 전해진 행복감과 만족감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먹는 음식이 제한적이다. 코알라만 해도 한평생 유칼립투스 잎만 먹는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코알라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자고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그 이유가 유칼립투스 잎에 독성분이 있어서 그렇단다. 유칼립투스 잎에서 추출한 오일(oil)에 방부제, 방향제, 이뇨제, 소독제 등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다량의 독을 품고 있는 유칼립투스 잎만 평생 먹는 코알라는 평생 동안 식곤증이 아니라 독에 취해(!) 자는 거다. 어쨌거나 하루 최대 20시간을 자는 코알라는 위가 보낸 신호를 뇌가 잘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뭘 먹지?’하고 점심시간만 되면 오가는 카톡 문자나 전화는 무서울 정도다. 인간에게 있어 음식이란 그저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도 채우고 동시에 마음도 채워야 하는 아주 복잡한 문제다. 그 진화론적 밸런스가 무너지면, 다이어트 음료를 한 통 가득 마시고 나서도 태연스레 밥솥을 열거나 과자 봉지를 집어 든다.
본의 아니게 줄기차게 비판당한 죄(!)없는 우리 와이프에게 오늘밤 팥빙수 한 그릇 먹자 해야겠다. 여름이면 집사람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빙설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다이어트 음료 그만 먹을까? 난 지금 당신 모습이 딱 보기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