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보물이 아니었다(?).문화재청이 지난 23일 지정문화재 지정 및 명칭변경 등을 예고했다.이에 따르면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이번에 새롭게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또 보물 제455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는 ‘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로 명칭을 변경한다고 예고하기도 했다.다시 말해 그동안 보물 제455호로 등록된 황오동 금귀걸이는 이번 지정 예고기간을 거쳐 새로운 보물번호를 부여하고, 보물 455호는 노서동 금귀걸이로 명칭을 바꾼다는 것이다.이 같은 지정예고가 쉽게 이해가 되진 않지만, 사연을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지금부터 85년여 전인 1933년 4월 경주 노서동 215호 고분에서 주민 김덕언씨가 금귀걸이 1점을 비롯해 금반지, 은반지 각 1점, 금구슬 33알을 발견했다.이후 김씨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일본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조선고적연구회의 후원을 받아 발굴, 나머지 금귀고리 1점과 금은 팔찌 2쌍 등과 금구슬 44알, 비취색 굽은 옥 1점 등을 추가로 출토했다.그러나 출토된 유물은 한국과 일본으로 나눠졌다. 김 씨가 수습한 유물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아리미쓰가 발굴한 유물은 발굴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은 채 도쿄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흩어졌다. 하나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었지만 누가 발굴했느냐에 따라 금귀걸이 1쌍이 서로 다른 박물관으로 나눠진 것이다.1965년 한일협정 체결에 따라 일본에 있던 유물이 1966년 5월 환수됐고, 그제서야 국립중앙박물관에 한데 모였다. 당시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은 노서동 고분 출토 유물 중 금팔찌(454호)·금귀고리(455호)·금목걸이(456호)를 보물로 지정했다.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문화재대관’을 비롯해 각종 전시도록이나 자료에서 보물 제455호를 소개하면서 ‘노서동 금귀걸이’가 아니라 ‘황오동 출토 금귀걸이’ 사진으로 잘못 써왔다는 것. 30년 넘게 사진이 잘못 사용됐지만 아무도 몰랐다.그러다 2000년 이한상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의 논문을 본 아리미쓰의 제자인 후지이 가쓰오(藤井和夫)가 “논문사진에 실린 사진이 노서동 금귀걸이가 아니다”고 알려 오면서 이 사실이 밝혀졌다.하지만 2009년 뒤바뀐 보물 제455호를 처리하기 위해 열린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이 같은 오류를 잡기보다는 황오동 금귀걸이가 더 화려하다는 이유로 보물 455호로 지정하기에 이른다.즉 노서리 금귀걸이는 보물에서 빠지고 ‘황오동 금귀걸이’가 정식으로 제455호로 대체된 것이다.이에 대해 문화재위원회 위원은 “노서동 금귀걸이가 보물 제455호의 지위에 있음에도 황오동 금귀걸이 사진을 대신 게재했던 것이 학술적인 오류였다”며 “또 2009년 노서동 금귀걸이 대신 황오동 금귀걸이로 보물 지정번호의 명칭까지 바꾼 것은 행정절차적 오류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외양으로 보면 1949년 황오동 52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가 더 화려하고 세련미가 뛰어나다. 삼국시대 전형적인 5~6세기 유물로, 접합부위가 매우 세밀해서 육안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을 만큼 세공기술이 돋보인다. 특히 펜촉형의 금귀걸이 세부 장식까지 정교하고 뛰어나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반면 노서동 귀걸이는 늘어뜨린 밑부분 장식이 통통한 심엽형(나무잎 모양)이어서 황오동 금귀걸이에 비해 시원한 멋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리가 약간 찌그러진 게 흠이지만 신라 6세기 전형적인 태환이식이다.문화재청은 이번에 뒤늦게나마 노서동 금귀걸이의 지위를 되찾아 주는 한편, 보물 제455호로 잘못 등록돼있는 황오동 금귀걸이는 새로운 보물번호를 부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명칭변경 예고는 보물 제455호가 1966년 일본에서 환수된 노서동 금귀걸이임에도 불구하고 ‘황오동 금귀걸이’로 잘못 인식돼 온 것에 대해 바로잡는 조치”라며 “그동안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던 노서동 금귀걸이가 지정예고 기간을 거쳐 별다른 이견이 없는 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