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2년(영조28)부터 1910년까지 왕의 동정을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1780년(정조4) 1월 26일 기록에 입시(入侍)한 김상집(金尙集,1723~?)·권응규(權應奎,1721~1789) 등이 정조와 나눈 대화에서 경주를 평하는 말이 오간다. (한국고전종합DB 참조) 내(정조)가 승지 김상집에게 “경주의 풍속은 어떠하던가?”하니, 김상집이 “이곳이 비록 고도(古都)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은 간교하게 속이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합니다.”하였다. 내가 “무슨 고적(古蹟)이 있던가?”하니, 김상집이 “일곱 가지 괴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옥적(玉笛)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인데 한 사람만이 잘 불었고, 송순(松笋)은 원 그루를 베어내도 새순이 또 그 뿌리에서 생겨납니다. 오색작약(五色芍藥)은 한 떨기에 각각 다섯 가지 색이 있고, 지영(池影)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는데 투명하기가 거울과 같습니다. 안압지(雁鴨池)에 흙이 떠 있는데 넓이가 반석(盤石)만 하고, 그 위에 덩굴풀이 있는데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나머지 두 가지 괴이한 것은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개들이 모두 꼬리가 짧고, 사람들은 혀가 짧은 사람이 많아 말소리가 새가 지저귀는 것과 같습니다”하여, 내가 “괴이하다”하였다.  ☞강릉김씨 김상집은 1755년(영조 31)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암행어사·한성부판·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특히 오랫동안 암행어사를 하며 민심과 불합리한 점을 아뢰었다. 그는 신라의 옥적과 생명력 강한 소나무·안압지의 떠다니는 섬·동경이 등 괴이한 7가지에 대해 고하면서, 경주의 풍속이 간교하고, 백성들은 말이 빠르고, 혀 짧은소리의 심한 방언을 사용한다며, 천년고도 경주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평가를 내놓는다. 김상집이 “또 수만호(水曼胡)가 있고, 또 안경(眼鏡)이 있는데 절품(絶品)이라고 합니다. 또 부(府)의 7리 밖 산에서 옥정(玉精)을 캐는데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 매우 많아 폐단이 지극히 심합니다”하여, 내가 “그곳의 오정(烏精)은 매우 좋다”하니, 김상집이 “오정은 품질이 매우 좋습니다”하였다. ☞수만호(水曼胡)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로, 옥정(玉精)은 수정원석을 말하며, 경주 남산의 수정으로 안경을 만든 기록은 현재까지도 구전으로 전해진다. 특히 1636년 경주부윤 민기(閔機,1568~1641. 재임1636.4~1637.6)가 남산 수정으로 만든 안경을 착용한 사례가 있고, 이후 대대로 민씨집안의 가보로 전해졌으며, 19세기 강위는 포석정 앞 수정을 직접 언급하면서 수정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게다가 남산에서 생산되는 수정은 최고품질의 것으로, 안경알로 제작되어 조선 선비들의 어두운 눈을 환하게 해주었으나, 그 생산과 제작에 있어 백성의 노동력 착취에 대한 폐단도 발생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 중이며, 곧 성과물이 나올 예정이다. 김상집이 “경주에 옥산(玉山)이 있는데, 고 찬성(贊成) 이언적(李彦迪)이 살던 곳입니다”하여, 내가 “자손이 그대로 살고 있는가?”하니, 김상집이 “서손(庶孫)이 살고 있는데, 적손(嫡孫)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庶孫居之而與其嫡孫甚不睦矣)”하였다. 내가 “겸춘추가 잘 알 것이다”하니, 권응규가 “그 서손은 이전인의 자손입니다”하여, 내가 “연전에 상소한 자가 그 사람이다. 왜 옥산이라고 부르는가?”하니, 김상집이 “그 위에 자옥봉(紫玉峰)이 있기 때문입니다”하였다. 내가 “사는 곳이 좋다. 적손이 누구인가?”하니, 김상집이 아뢰기를 “이헌묵(李憲默)이 바로 그 적손인데, 지금 박천 군수(博川郡守)입니다”하였다. ☞겸춘추를 지낸 안동권씨 권응규는 영천의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문하에서 수학하고, 1765년(영조41) 문과에 급제해 정랑·자인현감·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으며, 경주의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회재의 후손들과 긴밀함이 있었다. 회재의 혈손(血孫)·서손인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은 독락당을 중심으로, 계손(系孫)·적손인 이응인(李應仁,1535~1593)은 양좌동을 중심으로 무첨당 이의윤·양졸당 이의징·설천 이의활·수졸당 이의잠·오의정 이의택 등 자손들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 유학을 기반으로 가계계승을 위해 양자(養子)를 두었고, 양자는 재산과 함께 제사 등 모든 권리를 상속받았다.  이는 적손이 회재선생으로부터 혈통과 경제적 재산·사회적 신분까지 계승된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적손 이응인의 후손 이헌묵은 회재선생의 후예라는 이유로 세자의 강학(講學)을 위해 특별히 사서(司書)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서손의 경우 벼슬에 나아가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이 역시도 서손과 적손 간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가 되었으며, 시대의 제도가 낳은 안타까운 현실적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엔 서손과 적손의 신분 차이와 적서차별에 대한 집안 간 시대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미래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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