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인살롱[3]
1960년대 경주에 혜성처럼 나타난 여성 사진사,박성자 여사의 사진과 삶
경주 대표 베테랑 사진사… “경주 사람들 웬만하면 제가 다 찍어드렸죠”
“50년 넘는 시간동안 모아둔 사진 관련 자료와 기억들을 모아 꼭 전시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아직 그 꿈을 펼치진 못했지만 모아둔 자료들을 썩히기는 아까운 일이지요. 이 많은 자료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어른들에게는 추억을, 신세대에게는 사진의 산 역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봉황로 문화의거리(경주시 노서동) 내에 있는 신광사진관의 오늘을 있게 한 안주인 박성자(75) 여사의 말이다. 경주서 2대째(1대 김정봉 대표에 이어 2대 김상범 대표) 운영되고 있는 이 사진관의 태동은 1960년대다. 1967년 개업해 51년째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열고 있는 유서깊은 이 사진관에서 부부가 함께 평생을 운영해왔다.
경주 사진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이 사진관은 경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오랜 단골 손님서부터 젊은층까지 애용하는 저력과 뚝심의 사진관이다.
올해 초, 1대 김정봉 대표는 오랜 숙환으로 필생동안 일했던 신광사진관과 가족곁을 떠났지만 사진관 곳곳에는 영화에서나 봄직한 카메라와 2대에 걸쳐 활약하며 일해 온 손때 묻은 많은 기종들이 진열돼 있었다. 특히, 1대 안주인 박성자 여사의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1960년대 당시 경주에서 젊은 여성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일을 한다는 것은 편견을 깨는 매우 신선한 일이었을 것이다.
스물 한 살부터 사진 일을 계속해온 경주 사진계의 산증인인 박 여사는 지난 반백년 사진 인생의 여정을 시종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수 년 전부터 현역에서 활동하진 않지만 자부심으로 일렁이는 눈빛은 곱고도 당당했다. 일관되게 겸손하고 성실한 그의 자세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노련함이 몸에 배여 있어 그윽하고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이었다.
-“경주에서 부부가 사진관을 평생 운영한 이는 저희 뿐인거 같습니다” “아주 어려운 세월이었죠. 어머니가 딸이든, 아들이든, 기술을 한 가지씩 익히라고 하셔서 우리 형제들은 기술을 배웠습니다. 저는 사진관에 취직해서 바로 배웠는데 사진이 제게 잘 맞더라구요. 일제강점기 사진관을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사장님 기술이 대단하셨죠. 약 5년간 기술을 배워나갔습니다”
1967년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남편(1대 김정봉 대표)을 만나 함께 일했고 남편이 군대에 다녀온 3년간의 공백기엔 박 여사 혼자서 기사들과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경주엔 5~6군데 사진관들이 있었고 대왕극장 앞 2층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제가 기계들을 가지고 출사를 직접 다니기도 했습니다. 전기 발화기가 달린 막대달린 판에 마그네슘가루를 한줌 올리고 그걸 한순간 불태워서 카메라 플래시로 사용했어요. 한 손으로는 마그네슘으로 화약을 터뜨리면서 ‘꽝’ 소리가 나며 전체를 밝혀 그 많은 이들에게 빛을 주면서 환하게 잘 찍히는 거죠. 실내에서는 무조건 터뜨려야했죠. 그래야 선명하게 찍혔으니까요. 전기 사진(방전관)이 나오기는 했어도 전기조명도 약해서 마그네슘 사진이 여전히 각광 받았습니다. 후일 조명시스템이 보강되고 좋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됐지만요”
“전통혼례 사진 의뢰가 너무 많았던 시절엔 사진사가 귀한 시절이었으니 손이 모자라 첨성대 아저씨도 빌리고 반월성이나 안압지 등의 고적지 야외사진사들을 일당을 주고 빌렸을 정도예요. 하루에 몇 건씩 결혼사진 의뢰가 들어오니 보통 3~4일씩 밀린 일을 하느라 잠을 못잘 정도였죠. 사진을 수정하는 등 디테일한 일들이 많아서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었던 거죠. 흑백사진 수정은 일제 HP연필로 했는데 스케치 하듯이 그려서 얼굴 모양을 잡았습니다. 코가 낮으면 코를 살짝 올려주고 일종의 성형을 해준 것이었죠(웃음)”
그러니 낮에는 사진 찍고 밤에는 수정 작업 등을 하느라 밤낮없이 일을 했던 것이다.
-사진 수정(보정)의 일인자, “작은 암실속에 아침에 들어가서 밤 12시가 돼야 나왔는데도 일하는 재미로 행복했어요” 60년대 후반부터는 줄을 세울 정도로 바빴다. 사진관으로 찾아오는 일반적 사진 종류는 기본이었고 점차 신식 예식장 결혼이 많아지면서 구식 결혼과 신식 결혼이 공존하던 시기여서 정신없이 바빴다고 한다. 그때는 예식장마다 하루에 30쌍씩 식을 올렸으니 일이 자연스레 많을 수 밖에.
“저는 비록 작은 체구의 여자지만 어느 분야든,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떨리는 것 없이 무척 당당했어요. 많은 대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다른 이가 보이지 않고 피사체만 보였죠. 많은 대가족 중 어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리 배치, 의상, 자세의 흔들림 없이 찍느라 오직 집중해 찍었죠. 한 눈에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사진을 찍었지요. 요즘처럼 찍고 또 찍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완벽하게 찍어야 하니 더욱 그랬지요. 그것이 기본이었고 책임감이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박 여사의 음성엔 여전한 자긍심이 배여 있다.
“일이 많아서 시간에 쫓겨 힘들었지 사진일이 저는 항상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작은 암실속에 아침에 들어가서 밤 12시가 돼야 나왔는데도 일하는 재미로 즐거웠어요. 늘 새로운 사진이고 새로운 작업이잖아요”
“여성사진사가 남성보다는 비교적 수정하는 일에서는 앞섰던 것 같아요. 사진 보정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밀한 작업을 조용하게 하는 것이 아마 제 천성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사진 수정시 얼굴에 천만번 연필로 그어도 연필 자국 표시가 나면 안되고 자국이 남지 않아야 합니다. 사진은 실물과 같으면서도 예쁘게 해야 하는 것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포토샵으로 지나치게 인물을 미화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선 사진이 아니지요. 그 사람과 같아야죠”
-에피소드들: “혼례 사진을 찍어주던 그 처녀 사진사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예전에는 고을마다 동네마다 전통혼례를 많이 올렸었다. 박 여사는 여성 사진사로서 새신랑의 차를 타고 결혼사진을 많이도 찍었다고 한다. 가는 길이 너무 험해 좁은 도로에서 차바퀴가 빠져 우인(友人)들이 차를 들어 올려 겨우 빼내어 해가 질 무렵에서야 신부 집에 도착할때도 있었다. 신부 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을테고. 박 여사는 조심스레 사진기계를 세워두고 식이 끝날때를 기다리면 곱게 단장한 예쁜 새색시와 새신랑이 서로 맞절하고 나서 사진을 찍었다.
“이때 신랑의 친구들은 길다란 거울, 주전자, 냄비, 찜통, 밥그릇, 수저, 밥솥, 세숫대야 등 여러 가지 기물들로 사진의 배경을 멋지게 장식해 주곤 했습니다. 때로는 꽃다발이 등장할때도 있었고요. 긴 두루마리에 적은 글에는 신랑과 재밌게 놀던 추억의 내용들이 담겨 있었고 이를 친구들이 목청을 높여 읽어 내려가곤 했었죠”
동네 사람들은 이런 풍경들을 길게 목을 쭈욱 내밀고 담장 너머로 보기도 했다. 축사가 끝나면 당시 처녀사진사였던 박 여사는 결혼사진을 찍었다. 또 예전에는 젊은 청춘 남녀들이 부모님이 잠든 밤에 트럭으로 마을에서 한 차씩 와서 쇼나 공연을 구경하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짜장면 사먹고는 다시 몰래 돌아들 가곤했었다고 했다.
“그분들이 지금은 다들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잘 모르지요. 하하. 혼자서도 찍고 두 세 명씩 같이도 찍고 단체로도 찍어 갔어요. 명함판 작은 사진을 엄청나게들 찍어가셨죠. 옛날에는 농촌에서 살기는 어려워도 여유가 있으셔서 늘 표정이 밝았던 것 같아요”
-“어디가 있든, 밤중에라도 저를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다 못알아보는데 그 분들은 어느 시골 골짜기에 가도 알아보십니다”
“제가 어느 곳, 어느 자리를 앉아도 ‘신광사진관 안주인’ 아니냐고 하시고 알아보시니 행동거지를 함부로 할 수 없어요”
박 여사는 최근 수 년전 까지만해도 카메라를 잡던 베테랑 중 베테랑 사진사였다.
“제가 사진을 시작한 지는 54년째입니다. 스물 한 살 3월에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고 노년엔 손님이 ‘사진 할 줄 아느냐’고 반문하면서 돌아섰어요. 특히 젊은 친구들이 돌아서 나가 버리니까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최근의 사진 작업은 대부분 컴퓨터 작업을 해야하는데 나이든 사람이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겠죠. 평생 새로운 사진을 도입하면서 사진의 흐름을 읽고 늘 새롭게 익히면서 일 해왔는데 말이죠(웃음). 저를 잘 모르는 청년들은 제 실력을 잘 믿어주지 않더라구요. 지금도 공원에 산책가면 청춘 남녀들을 한 번씩 휴대폰으로 찍어줘요”
-사진일은 항상 처음처럼...“아들이 언제나 손님에게 최선 다하고 교만하지 않고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해주기를” 사진 일을 마치면 전시관을 만들거라는 생각에 모든 손때 묻은 사진 관련 자료를 모아두었다고 한다. 삼각대, 마그네슘 카메라 플래쉬, 수정대, 수정용 연필 등 모든 자료를 모았다고.
“대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대신 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저보다도 사진을 더욱 좋아해주고 노력해서 다행이고 고맙지요” 김상범 2대 사장은 중학생일때부터 사진 일에 입문시켜 가업을 자연스레 이어 받도록 했다고 한다.
“대를 이어주는 아들이 구신식 기술을 오랜 세월동안 고스란히 전수 받도록 했습니다. 아들이 언제나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고 교만하지 않고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편 박 여사는 상당한 학구열을 가졌다. 평생 공부가 하고 싶었다고 하는 그는 일흔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2015학년도 한림중고등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모범상 및 표창장, 문예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