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힘들고 고달파질 때 혹은 경사스런 일들이 생길 때 어김없이 술 한 잔 생각이 든다. 한 잔 술로 시름은 덜고 기쁨은 배가시키는 매개로 술 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
허름한 선술집에서 대폿잔이 철철 넘치도록 잔을 기울이며 지인들과 나누는 정담은 그대로 하나의 시가 되었다. 차창 밖으로 비라도 올라치면 금상첨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술집 안에서의 풍경은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낭만적인 액자 속 따뜻한 인상이 된다.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여러 장소들이 있지만 예전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던 곳은 다름 아닌 주막집이었다. 혹은 대폿집, 식당, 요정의 형태로 다양하게 우리 곁에 있어왔다. 경주에도 다양한 이름의 술집, 주막집, 대폿집, 식당들이 여러 지역에 많이 있었다.
경주의 역사와 문화, 삶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랑방 역할을 하던 술집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우리 곁을 스치기도 했고 지금도 건재하다.
손윤락 전 신라문화동인회 회장(전 경주고등학교장)과 함께 ‘경주의 술집 이야기’ 라는 글을 바탕으로 예전 경주를 대표할만한 술집 몇 곳을 우리들 추억속으로 소환해 보았다.
-쪽샘 지역 술집들...문화예술인들 즐겨 찾아 서라벌의 자연과 낭만, 역사와 문화, 사랑과 인생 논하던 마당 역할 유명한 곳도, 그 이름을 거론할 곳도 많지만 특히 경주 사람과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경주의 술집’ 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바로 경주 쪽샘 술집들일 것이다.
경주 쪽샘 지역은 황오동, 황남동, 인왕동 지역을 일부 포함하는 지역으로 황오동의 쪽샘 우물가에서 시작해 형성된 지역의 명칭으로 20세기 들어와 생겼다.
경주시에서 이 지역을 문화재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하고 있어 우리들 뇌리속의 그 옛날 쪽샘 지역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에는 고분과 고분 사이사이로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가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주로 대거 유입되면서 쪽샘에서 시작해 첨성대 쪽으로 가는 길 좌우에 많은 민가가 형성됐었다.
첨성로 동편 지역인 쪽샘 지역에 언제부터 술집들이 생겨났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경주로 옮겨 온 사람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술집들이 하나둘 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골목마다 크고 작은 술집들이 100여 곳 이상이나 즐비해 쪽샘 지역의 주막집들이 전성기를 이뤘다. 이 시기에는 골목 안 집집마다 술집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집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술을 마실 수 있었던 분위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손님은 시민과 공무원, 교사, 당시 경주의 문인, 미술인, 음악가 등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이곳 술집들을 찾아 들었다. 술은 주로 막걸리가 주종이었고 기본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에 안주는 두부, 도토리 묵, 콩나물 무침, 삶은 오징어 등이 주류를 이뤘다. 그리고 모든 술집의 술값은 외상으로 통했다. 밀린 술값은 봉급날에 해결했는데도 외상이 수두룩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주막집에 하나둘씩 간판이 걸리기 시작했는데 주인 이름이나 그 술집의 특색이나 상징성에 따른 이름으로 간판을 붙였다고 한다. 희야집, 향화집, 숙이집, 녹수집, 정 매화집, 감나무집, 버드나무집, 오팔구, 황남집, 동원식당 등이 그 예.
술은 양조장의 막걸리가 주종을 이뤘으며 안주 값도 저렴해 밤새 술을 마셔도 술값에는 별 부담이 없었다. 이곳을 즐겨 찾았던 저명인사로는 당시 경주박물관 진홍섭 관장(이하 존칭은 생략함), 시인 청마 유치환 경주고등학교 교장을 비롯해 화가 손일봉, 고청 윤경렬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아 서라벌의 자연과 낭만, 역사와 문화, 사랑과 인생을 논하던 마당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곳이 전성기였던 것에는 ‘통행금지’가 없어서 술꾼들이 새벽까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것에 연유한다. 그들에겐 경주가 지상 낙원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이 지역 술집을 꼭 한번은 찾아야 경주를 제대로 구경했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후 점차 막걸리에서 동동주, 맥주, 소주, 정종, 양주 등으로 바뀌고 분위기가 달라져 술꾼들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서민들과 점차 멀어지게 되면서 80년대 이후에는 경주를 찾는 외래 관광객과 접대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애용했다. 2000년대 들어와 이 지역이 고적지 정비 사업지구로 선정돼 토지와 주택이 매입되면서 이 지역 주택들이 하나 둘 철거되기 시작한다.
이에 술집들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손윤락 회장은 “지금은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거나 발굴을 기다리고 있어 옛날의 명성 드높았던 주막집의 영화와 그 수많던 주객들이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 다만, 그 자리에서 옛 흔적과 낭만을 그저 더듬어 볼 뿐이지요. 이러한 경주 쪽샘 지역 술집들의 이야기들이 사람들간에 회자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기를 바래봅니다” 라고 했다.
-대밭집...한 여름 오후 대밭집 가면 우물속에 넣어 두었던 시원한 막걸리 맛 ‘천하일품’ 대밭집은 문화재 정비 사업으로 철거돼 그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는 술집이다. 대밭집은 현재 복원되고 있는 월정교 북쪽으로 경주향교 들어가기 직전의 오른편에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경주의 문인, 미술가 등 역시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계림을 돌아드는 실개천을 지나 왼편에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삼간 기와집이었다.
이 집에는 곱상한 할머니가 주모로 있었으며 70세 전후로 인심이 넉넉해 대밭집을 찾는 손님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 주었다. 삼복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한 여름 오후 대밭집을 찾아가면 우물속에 넣어 두었던 시원한 막걸리 맛은 천하일품 이었다.
술안주로는 명태포를 잘게 쪼개어 고추, 파 등을 초고추장에 묻혀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경주 남산과 월성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둥근 달이 솟아올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주었다. 당시 신라문화동인회원이었던 김주식, 김태중, 김윤근, 손윤락 등과 이상구, 김정석, 김인태, 최용주 등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통술집(식당)...음식 솜씨 좋아 맛이 정갈하고 값 저렴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던 집 통술 식당은 1970~80년대 경주 시내서 가장 번화하고 복잡한 거리인 지금의 신한은행 길 건너편 남쪽에 있었다. 당시는 경주시청 및 경주경찰서, 법원, 경주세무서 등 경주 대부분의 관공서가 이 부근에 있었다.
통술집은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 모든 시내버스가 이곳을 통과하고 바로 그 집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았다. 이 집은 주인할머니와 가족이 운영하고 음식 솜씨가 남다르게 좋아 맛이 정갈하고 값이 저렴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막걸리와 소주, 맥주가 주종을 이루고 냄비국수, 도토리 묵, 각종 생선회 무침, 두부, 꽁치구이, 가자미구이 등 값싸고 다양한 안주가 제공되었다.
주변이 현대적 건물로 정비 변화되면서 이 식당은 황오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주인도 그 친척으로 바뀐다. 소문에 의하면 이 식당은 다시 내남 어디론가 옮겨 갔다고 한다.
-도솔마을...사이다는 ‘법명주’, 막걸리는 ‘정담주’, 동동주는 ‘도솔주’, 맥주는 ‘부질주’, 고량주는 ‘고청주’, 소주는 ‘여여주’ 대밭집, 5609, 통술집 등의 명성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을 즈음 2000년대에 들어서서 혜성처럼 새롭게 등장한 곳은 바로 도솔마을이다.
이곳은 1990년 말에 경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문화예술인들이 신라고도에 알맞은 주막집을 만들어 경주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주막을 하나 만들자는 취지에서 우연한 자리에서 뜻을 모아 생긴 주막집이다. 1999년, 미모의 여인이었던 무심화 보살에게 경주다운 술집으로 만들자고 해 옛 것을 살려 손을 보고 술상 그릇까지 의논하고 장만해 근사한 주막집을 만들었다. 특히 주막집 이름은 당시 신라문화동인회 김윤근 회원이 제안한 ‘도솔마을’로 결정됐다.
술 종류와 술안주도 일반 시민들이 부담없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것으로 결정됐다. 문인들은 글을 표구해 내걸고 화가들은 그림을, 조각과 공예가들은 각자 작품을 적당한 곳에 배치하니 훌륭한 예술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 도솔마을은 내남 네거리 허름한 집에서 장소를 옮기게 되는데, 대릉원 서편에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 직전의 낡은 기와집을 찾았고 2003년 이사해 경주를 대표하는 밥집이자 술집으로 지금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곳은 방 마다 수류화개, 경주 남산, 부질당, 건달바, 빈방, 옛살라비, 야단법석 등의 독특한 이름이 명명됐다. 또 음료수와 여러 종류의 술도 특별한 애칭으로 부르는데 사이다는 법명주, 막걸리는 정담주, 동동주는 도솔주, 맥주는 부질주, 고량주는 고청주, 소주는 여여주로 부르고 있다. 안주로는 모듬전, 돌문어, 가오리, 도루묵찌개, 김치찌개, 가자미구이 등으로 다양하다.
이곳은 주막집으로 술꾼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식사와 함께하는 술자리로 국내외 방문객들로 넘쳐나는 명소가 되었다.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삶과 인생, 경주의 역사문화를 이야기하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손윤락 회장은 “달이 환하게 뜨고 별들이 총총한 밤거리에 신라의 두두리(도깨비)들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먼 몇 천년 전으로 거슬러 갈 수 있도록 손님들이 계속 찾아와서 오래오래 남아주기를 바랍니다”라면서 그 옛날 술집에 표석이라도 세워 옛 추억을 다시 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