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를 로맨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니 와이프가 슬쩍 다가와 귀에다 대고 이런다. “저기 저 석양(夕陽) 멋지지? 사실 저거 다 먼지다!” 얄궂은 콧바람 소리에 맬랑꼬리해진 내 기분이 확 쪼그라든다. 아내 해석으로는 대기 속에 있는 먼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붉게 보이는 거란다. 뒤집어 말해 대기 중에 먼지가 없거나 공기가 너무 맑다면 석양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세상이 너무 깨끗해도 문제라는 이야기다.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 법이다. 더 나아가 좋은 것이 항상 좋을 수도 없고 때로는 부정적인 것이 오히려 긍정적이기도 하다. 가령, 나는 책상에 앉아 있으면 5분도 안 되어 상체가 앞으로 쏠린다. 이상하게 자꾸 고꾸라진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다. 올 봄이 되어서야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난겨울 밤마다 아들 녀석이랑 라면과 아이스크림을 즐겼더니 배와 허리 주변에 제법 살이 붙었는데, 아니 그랬더니 앞으로 쏠리는 버릇이 한순간에 없어져 버린 거다. 배에 살이 없을 때는 허리가 구부정해졌는데 살이 붙은 지금은 서나 앉으나 허리가 꼿꼿하다.  “뱃살아, 정말 고맙다!” 겨울에 불어대는 칼바람에 여린 가지들이 툭툭 잘도 끊어진다. 얄미운 바람이다. 하지만 봄에 꽃을 활짝 피우려면 뿌리는 겨울이지만 언 땅 더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지나 줄기를 흔들어줘야 그 반동으로 뿌리가 더 밑으로 내려가는 이치다. 가지가 부러져서 미안하지만 긴 호흡으로 봤을 때 매서운 겨울바람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문제는 이걸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거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바람에 부러진 가지이지 땅 속 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북극에 떠다니는 빙산만 해도 그렇다. 수면 위 일각(一角)만 겨우 볼 수 있는 우리가 수면 아래 거대한 얼음산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사건도 그걸 증명한다.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智慧)의 눈이 없는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행과 불행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고 예측 불허하다. 이 땅에서의 삶은 이처럼 부정(否定)이라는 얼굴을 한 긍정(肯定)도 알아야 하고,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알아야 한다. 쉽지 않다. 사실 정말 어렵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죄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눈가나 손에 주름이 깊이 박힌 이들인 모양이다. 돌부처라는 별명의 이창호 프로 바둑기사도 본인의 자서전에 ‘위기(危機)란 말 자체가 그렇듯 위험과 기회는 항상 동시에 주어지는 법’이라고 한 것도 지혜의 금구(金口)다. 냉혹한 승부사인 그가 패색이 짙은 경기에서도 끝까지 돌을 던지지 않았던 이유는 위기 속에 숨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우리 몸은 딱딱한 뼈와 부드러운 살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감사할 일이 참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줍기 아닐까 싶다. 손가락이 뼈로만 되어 있으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머리카락을 절대 주울 수 없다. 젓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집을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그렇다고 손가락이 살로만 되어 있어도 마찬가지다. 손가락뼈로 머리카락을 지그시 누르고 동시에 뼈와 머리카락이 만든 틈을 살로 채울 때 비로소 머리카락을 집을 수 있는 것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해야 뭔가 일이 된다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머리카락 줍는 로봇은 아마 세상엔 없을 거다. 이미 개발이 됐다고 해도 전선줄과 모터가 주렁주렁 달린 아주 복잡한 기계일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을 알 리가 없고, 뜨거운 여름날 더 뜨거운 삼계탕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이유를 모르는 한, 손가락 두 개면 할 수 있는 일을 아주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 두서없는 글이라도 끝은 있어야겠지, 어쨌거나 오늘의 결론은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 싶다. ‘장미가 아름다운 건 정열적인 크림슨색 꽃망울과 어딘가 숨어 있을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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