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수틀
-나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버렸다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오래된 수틀 속에서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이 압정에 박혀팽팽한 그 시간 속에서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꿰어라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바늘 끝,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그 통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헝겊의 이편과 저편, 건너가면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오래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돌아오라, 집 나가서 소식 없는 내 영혼이여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청소를 하다가 어느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수년 전에 읽다만 책을 발견한 적이. 나를 자극했고 그만큼 나의 내면을 형성하게 했던 책. 지금도 여전히 필요한 책. 더욱이 어느 날 내 눈에 띈 것이 마주치기 싫은 자신의 얼굴이라면? 잠시 방심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계절이 아니 생의 한 시절이 훌쩍 건너가버린 체험을 겪곤 한다.
이 시는 오랜 동안 방치된 수틀을 통해, 정체되어버린 자신의 젊음의 한 때를 발견하는 아찔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싹 틔우지 않은 씨앗,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은 꽃,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는 파도,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는 구름. 슬로비디오의 정지화면처럼 선명한 그 수(繡)는 멈춰버린 시간과 정체된 자아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 열정은 어디 가고 녹슨 바늘만, 실 뭉치만 덩그라니 내 앞에 남아 있는가. 멈춰버린 내 젊음이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갔던” 그 통증을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내 몸도 각오도 팽팽하기만 하니. 돌아오라. “오래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오래 전 집 나가서 소식 없는 내 영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