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의 남쪽 문천(汶川·蚊川·南川)에는 휘감아 흐르는 물과 주변의 빼어난 경치 덕분에 예로부터 남정(南亭)·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풍영정(風詠亭) 등 많은 정자가 있었으나, 세월의 풍파와 후손의 관리소홀 등으로 현재는 온전한 정자를 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고풍스런 멋을 담은 정자가 아직 남아있으니, 바로 문천 가 교촌마을에 자리한‘교동석등있는 집’내의 숙연당(肅然堂) 현판이 걸린 건축물이다. 문천을 향해 세워진 이 건축물은 안타깝게도 앞에 돌담장이 가로막아 정자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다행히 최근 이곳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필재정(必在亭)이라는 옛 이름을 찾게 되었다.  필재(必在)의 의미는 『논어(論語)』「옹야(雍也)」의 “계씨가 민자건(閔子騫:공자의 제자)으로 하여금 비(費) 땅의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니, 민자건이 계씨의 심부름꾼에게 말하길 나의 사양함을 잘 말해주게. 만약 나를 다시 등용하려 사람을 보낸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를 건너 제나라 땅에 있을 것이다(季氏, 使閔子騫, 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吾必在汶上矣.).”에서 인용한 말로, 계씨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민자건의 곧은 심성을 표현하였다.  정자의 주인은 경주최부자의 12대 마지막 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1884~1970)선생으로, 예전부터 있어온 필재정을 자신이 이어받아 소유하고, 정자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으며, 또 이곳 교촌마을의 필재정을 통해 많은 시인묵객을 만나 소통하였다. 향후 교촌마을과 향교 그리고 경주학문과 도통연원을 중심으로 필재정 연구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일제강점기 어느 날, 영천출신의 낭산(朗山) 이후(李垕,1870~1934) 역시 경주를 유람하면서 교촌마을에 들러 필재정에 올랐고, 이때 후학인 최준을 위해 필재정의 내력과 그 의미를 공고(鞏固)하면서 민자건의 말을 빌어 최준에게 학업의 성취와 인성[덕]의 완성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그 기록을 살펴본다. [필재정기]동도를 찾아 유람하는 자라면 반드시 교촌 최씨의 별장에 이른다. 최씨는 동도의 저명한 가문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장엄한 광경[정자]이 많기 때문에, 동도를 둘러보고도 교촌을 찾지 않으면 보아도 오히려 보지 못함과 같다.  침랑(寢郞[참봉]) 최준은 어려서 일찍이 세상에 뜻이 있었으나, 마음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또 문천 가의 정자를 얻어 정자의 이름을 필재정(必在亭)이라 하였다. 정자는 반월성의 동쪽에 있으며 산천의 형세가 동도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지난해 나는 동도를 유람하며 침랑 최준의 정자에서 수일을 머물렀는데, 정성스런 대접에 유람의 상세함을 얻을 수 있었다. … 아! 바야흐로 신라가 성하였을 때는 사람들이 각각 그 생활을 편안히 여겨 이곳에서 살았고, 유람하는 자들 모두가 기뻐하며 자득(自得)한 즐거움이 있었으나, 고려 이후로 이미 쓸쓸해져서 다른 시대의 슬픔이 있었다.  만일 석양이 산에 비끼고, 철새가 구름 속에서 울어대고, 궁의 담장엔 풀이 우거지고, 누런 잎이 어지러이 날리는 가운데 이 정자에 오른다면 자리에 앉아 탄식을 자아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얼마 후 정자의 이름을 가리키며 묻기를 “이 필재정의 이름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 하니, 최준은 웃으며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제가 아직 정자의 이름을 고치지 않았습니다.”라 하였다.  나는 또“아직 정자의 이름을 고치지 않은 것 역시 고칠 마음이 없어서가 아닌가?”라 하니, 최준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차 돌아가려는데, 최준이 청하여 말하길 “정자는 기문이 없기가 불가합니다. 제가 선생께 기문을 부탁드리는 것은 스스로 생각에도 필력이 모자라 정자의 실체를 칭하기가 부족해서이오니, 감히 바로 승낙치 않으시면, 후에 또 더욱 부지런히 친히 부탁드릴 것입니다. … ”라 하였다.  바야흐로 민자건이 당시에 계씨가 비록 노나라를 전정(專政)하여 나라와 군주가 있을지라도, 민자건이 벼슬하려하지 않는 뜻이 저와 같은 그러한 결단이 있었다.  이에 ‘내 반드시 문상(汶上)에 있으리라’ 말하였으니, 만약 계씨가 다시 찾아왔다면, 민자건은 반드시 그 말대로 실천하였을 것이다. 만일 민자건으로 하여금 이미 문수를 건너 제나라에 있게 하고, 불행히도 노나라에는 없고, 또 제나라에도 없고 더불어 갈만한 나라도 없게 한다면 민자건은 마땅히 어디로 가야만 하겠는가?  아마도 또한 ‘갈만한 곳이 없을지언정 차라리 끝내 문천 가에서 늙어죽을 것이다”라 말하지 않았을까? 아!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민자건의 어진 덕행이 이 하나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으니, 그것으로 덕행의 과정으로 삼아야 한다. 크도다. 침랑 최준은 더욱 스스로 덕을 닦고 행실에 힘써서 민자건의 신실함을 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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