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까지 찾아오는 수많은 국내외 방문객들이 경주의 자연, 환경, 토양, 역사속에서 문화를 볼 때 그들 유물도 함께 바로 경주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출토지가 가장 우선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특히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은 ‘국보 중에 국보’인데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국보급 유물 즉, 핵심 유물이 대거 빠져 있습니다. 경주박물관 불교미술실에서 가장 핵심적인 유물이 이 4점이고 특히 금속 유물로는 국보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경주로 와야 할 것입니다”
문화유산은 있었던 자리에서의 보존이 최선이요,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한다고 해도 그 고장에 있어야 차선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석우일 신라역사과학관 관장(전 경주박물관대학 초대설립위원(부회장)의 말이다.
유물발굴과 가치 평가의 의의는 출토지에 근거해 그 유물이 현재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유물과 문화 형성 과정 연계는 출토지 별로 평가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기도 하다. 사정상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이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경주박물관 미술실에 전시돼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입장에서 본 기사는 석 관장의 ‘돌아와야 할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2008, 신라문화동인회 50년사)’에서 발췌하고 석 관장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의 소불들은 조각 양식과 기교가 금속공예로서는 절정기 시대 작품, 석조입불들은 석굴암 조각에 앞서는 일련의 우수한 작품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는 국보 79호 및 국보 80호의 순금제 소불 2구와 국보 81호와 82호의 화강암제 대불 2구를 볼 수 있다. 소불 2구의 대좌와 광배는 금동이며 따로 분리해 만들어 불상과 함께 조립한 것이다. 대불 2구의 대좌는 대좌대와 한 덩어리의 돌로 광배는 불상과 한 덩어리의 돌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소불들은 황복사지 3층 석탑의 2층 탑신석에서 죽간에 묵서로 기록된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에 발견됐다. 대불들은 감산사의 폐사지 논바닥에서 엎어져 있는 채 발견되었다.
소불들은 사리 그릇의 뚜껑에 명문을 새겨 금석문을 남겼고 대불들은 광배 뒷면에 글을 새겨 조상기(造像記, 석상, 동상 따위를 만든 사연이나 유래를 적은 글)를 남겼다. 이들 경주 출토 국보불상 4점의 조상기도 중요하지만 통일신라의 불상 조형미와 양식도 특이한 계보를 형성하면서 전개됐다고 했다. 소불들은 1942년 일본인들이 탑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해체해 수습된 유물들을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고 대불들은 1915년 일제가 탈취한 경복궁 특설 미술관으로 옮겼다. 이들은 모두 개칭한 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석우일 관장<인물사진>은 “특히 무열왕(654~661년)~혜공왕(765∼780)까지가 통일신라의 새로운 문화형성이 가장 발달한 시기였습니다. 그 100여 년이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상 불교문화가 가장 발달한 전성기였다고 봅니다. 불국사, 석굴암, 성덕대왕신종 등의 황금기의 문화가 이때 형성됐던 것이지요. 위에 소개된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의 소불들의 조각 양식과 기교들은 금속공예로서는 절정기 시대 작품이었고 석조입불들도 석굴암 조각에 앞서는 일련의 우수한 작품이었습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황남대총 출토 유리병, 금령대총 출토 기마인물상, 감은사지 동탑 출토 사리기 등등이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 전시돼 있습니다. 금속, 석조 등에 걸쳐 중요한 보물급, 국보급 유물이 중앙에 있는 것이죠” 아래는 경주 출토 국보 불상 4점의 미술사적 가치와 명문 조상기에 근거한 의의 등에 대해 짚어 보았다.
-국보 제 80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태양처럼 빛나는 부처가 되다 소불 두 점 중 입불은 효소왕(692~702)과 그의 어머니 신목태후가 돌아간 신문왕(681~692)을 위해 탑을 세우고 왕의 얼굴을 닮은 듯 광대뼈가 살아있는 초상 조각을 순금제 여래로 만들어 안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방식의 장엄구 안치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에 속한다.
소불입불은 비례적으로 볼 때 몸에 비해 얼굴과 손이 크다. 민머리에 목에 삼도는 없지만 버럭 뜬 눈과 입가의 고졸미로 자비로운 부처다움은 있다. 복련(覆蓮,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것처럼 그린 연꽃 모양이나 무늬)의 대좌위에 당당히 버티고 선 이 소불은 광배가 압도적이다. 4줄의 동심원과 대칭의 투각불꽃 문양은 작렬하는 화려함으로 왕즉불(王卽佛)의 절대적 권위를 뽐내고 있다. 그는 태양처럼 빛나는 부처가 되었다.-국보 제 79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황복사지 삼층석탑 해체수리시 사리함에서 발견 1942년 착수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시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됐다. 한편, 효소왕이 6세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단명하자 그의 동생이 성덕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어 그의 어머니마저 돌아가니 성덕왕은 형왕과 어머니의 추복을 빌기 위해 형의 나이에 어울리는 이 순금제 아미타 좌불을 무구정광 대다라니경과 함께 다시 2층 탑신에 새롭게 안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불 아미타좌불은 7세기 초반부터 중당시기까지 중국에서 유행한 상현좌의 형식으로 양 어깨와 허리, 양 무릎밑의 대칭적 옷 주름이 긴장된 격식에 치우쳐 매우 권위적이다. 하지만 원만한 투각 화염문(火焰文, 고대 건축·의장 등에 시문된 불꽃같이 삼각형상을 이룬 장식문양) 신광이 이를 해소시켜 주기도 한다. 부드럽고 통통한 얼굴의 소년이 머금은 미소는 복숭아형 두광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
-국보 제 81호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살짝 굽힌 허리와 가슴으로 관능적 여성미 뽐내 논바닥에서 엎어진 채 발굴돼 박물관에서 박물관으로 숨가쁘게 자리를 옮긴 화강암 석조대불 2구는 수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준다. 한편, 대불은 왕이 아닌 6두품의 6등급 관료 출신인 김지성이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왕 18년(719) 절을 짓고 어머니를 위해서는 여성적인 모습의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서는 남성적인 아미타상을 720년 이후 각각 1구씩 봉안했다고 한다.
석 관장은 조동일 교수가 광배 뒷면 조상기 해제에서 ‘성덕대왕신종 명문과 함께 신라문학의 최고봉’이라고 극찬했다는 것을 밝혔다. 또 성골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하위 기능인이 부처를 만들었던 이유 등에 대한 명문을 남겨 경이롭다고 하며 김지성은 우리가 같이 주목하고 기억해야할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바로 유가유식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감산사를 창건한 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는 것.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주형거신(舟形擧身) 광배를 갖추고 연화대좌 위에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비틀어 서 있으며 살짝 굽힌 허리와 슬며시 내민 앞가슴은 관능적 여성미를 뽐내고 있다. 귀걸이, 목걸이, 긴 영락이 무릎까지 휘어 내려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더욱 흥미진진한 것은 치마다. 치마끈이 벗겨질 듯 매력적으로 두르고 있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살찐 것이 미의 표준으로 바뀐 당대 중기 이후의 변화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자비의 미소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탄생 예감 석조 아미타불은 대좌의 주형거신 광배는 미륵보살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은 통견(通肩, 가사(袈裟)의 착법 중 양 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이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인이다. 양 어깨를 가리도록 입은 대의의 옷 주름은 큰 U자로 휘어져 곡선을 그린다. 72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이 불상은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적인 불교 작품이지만 무엇보다 이 불상의 얼굴에서 특히 눈과 눈썹의 각도와 자비의 미소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탄생을 예감할 수 있어 무척 울림이 크다.-“경주박물관 미술관 석조실에는 석조 국보 한 점 없고 금동소불실에도 국보 한 점 없습니다” 한국 미술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미술사에서도 당당하게 평가받는 이들 국보 불상들이 탄생한 곳은 신라 궁궐과 인접하고 있는 이른바 ‘동방 벨트’에서다. 월성의 동편 국립경주박물관과 불과 1㎞ 남짓한 낭산. 낭산에는 황복사지,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능지탑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성덕왕릉, 원성왕릉, 감산사지, 불국사와 석굴암, 장항사지, 감은사와 문무수중왕릉 등의 신라통일기 왕권이 팽배했던 시대의 지역이다.
석우일 관장은 “이 동방벨트에서 출토된 문화유산은 시대별 연관성과 신앙적 유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일제가 한반도 침탈의 희생양으로 이들 민족문화유산을 총독부 박물관의 포로로 수용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현재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천왕사지 녹유사천왕상을 비롯해 감은사지 동탑 출현 사리함마저 서울과 경주에 나눠놓고 있지 않습니까. 경주박물관 미술관 석조실에는 석조 국보 한 점 없고 금동 소불실에도 국보 한 점 없습니다. 핵심유물 상당수가 서울에 있어 경주 미술관은 초라하기까지 합니다”라면서 국립경주박물관이 신라 문화재를 보존 연구 전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박물관이 맞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동방벨트의 출토 유물은 하루 빨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일제의 잘못을 청산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개혁되고 개선돼야 할 전시 행정의 중앙집권적 권위 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석 관장의 의견에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 소장은 “가장 좋은 것은 유물이 본래 있었던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냉골에서 출토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1915년, 남산에서 완전하게 발견된 하나밖에 없는 불상입니다. 당연히 현장 바위 중턱에 있어야하는데 중앙박물관에 있죠. 다만, 보존의 문제라고 주장을 하는 견지에서는 현장에서의 보존에 안전성이 확보될때까지 박물관에 두더라도 가까이 두는 것이 좋지요. 부여 금동대향로의 경우 부여 군민들이 일제히 반대해서 되가져온거죠. 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만 해서 다시 부여박물관으로 돌아온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경주 지역민들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윤근 경주문화원장도 조상의 유물을 제자리에 모시는 작업을 긍지로 삼고 국내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에 대한 국내 조사를 통해 반환을 요청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순회 전시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석 관장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