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인살롱[2] 경주에서 열정 불태우며 작품 그리는 이천우 화백, “경주 남산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그려보고 싶습니다” 한국화가 지니는 본래의 전형을 오늘날의 그것으로 갱신하고 보편성을 구하는 화가가 있다. 고 정점식 계명대 교수가 ‘이들 작품에서 느끼는 푹신한 촉감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우리들의 잃었던 자연의 그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 작가는 바로 이천우 화백(77)이다. 동서양의 기법을 접목한 새로운 조형적 시도나 융합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동양의 정신성을 읽을 수 있다.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에서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얻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생활했던 고향 경주에 대한 아련한 추억 속의 풍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고 회고하는 선생은 평생 교육자로 있으면서 그림과 함께 살아왔다. 1943년 경주 서부동 출생으로 경주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사범대, 계명대, 계명대대학원에서 한국화를 공부했다. 대구와 경북의 중·고등학교 교사와 교장, 교육청의 연구사, 장학사, 교육장, 한국미협 부이사장 등을 지내면서도 그림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선생은 2017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의 12번째 개인전을 비롯해 수십회 단체전에 참가하는 등 평생 교육자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했던 것. 지난해 가을부터 경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선생을 만난 지난 21일은 더위가 맹위를 떨친 날이었다. 임시거처이자 작업장인 망월사 절방 한켠에는 한여름 더위를 고스란히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그저 한줄기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의 선생은 고행을 자처하는 수도자에 비견될만했다. 선생은 ‘바람’같다. 도대체 잡히지 않고 자유로이 유영하는 바람. 교육자의 면면이 노출되기도 했지만 특별한 굴곡이 없는 음성은 잔잔했고 아직도 수줍음을 타는 듯한 소년의 모습이 언뜻언뜻 스쳤다. 얼마전 개최된 경주 아트페어에 출품한 최근작 ‘신라의 달밤’의 산실도 이곳에서라고 했다. “‘신라의 달밤 노래나 한 번 불러보자’ 하고 그렸는데 월정교를 표현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엄청 쉽게 그려졌어요. 바로 이 방에서지요. 하하” 시원스레 한바탕 웃어재끼는 풍모에서 바야흐로 선생을 지탱하고 평생을 관통하며 원했던 그림 작업을 원없이 하고 있는 듯 했다. 앞으로 경주 남산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그려보고 싶다는 선생은 ‘원로’라는 표현이 무색할만큼 기개가 넘쳤다. -경주... 역사적 공간과 불교적 사유 등은 장차 예술적 감수성의 자양분 돼 선생은 감수성이 예민하던 학창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면서 계림숲을 주제로 수채화 작업을 많이 한 연유로 평생동안 그 숲의 이미지가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경주라는 역사적 공간과 불교적 사유 등은 장차 선생의 예술적 감수성의 자양분이 됐던 것이다. 1943년 선생이 태어날 당시 경주는 한국 근대미술 발전의 중심이었다. 황술조, 손일봉, 김만술, 박봉수, 김준식, 손수택, 손동진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배출해냈고 경주예술학교(1946~1952)를 중심으로 이들은 후진을 양성하면서 우리나라 화단에서 핵심적인 작가로 개성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예술적 환경 속에서 선생은 경주중·고등학교 시절 서양화를 전공한 최현태, 김준식 선생의 지도하에 계림과 반월성 풍경 등을 주로 수채화로 제작하며 미술계에 입문한다. 이 시기에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며 포교당 뒷채에서 작업하던 한국화가 지홍 박봉수(1916~1991) 선생의 다양한 제작 광경을 접할 수 있었다. 이 후 염태진, 조동벽, 이석우 선생께 수채화와 한국화를 사사하면서 1962년 부산사대 미술과를 졸업한다. 당시부터 수채화를 먹과 접목시켜 그의 독특한 한국화풍이 생겨나게 된다. 1961년 경남재건예술제 특선 후 1964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화단 활동을 시작한다. 산과 나무, 초가집, 꽃과 학, 연 등을 주제로 한 수묵과 채색의 독특한 향연은 그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수놓았다. 초가와 나무, 산을 점층적으로 배치하면서 여백의 미에 집중하고 수묵과 채색의 조화를 현대적 미감으로 추구한다. -자연과의 합일 중시한 동양 사상 심상에 두면서 지속적으로 창작 나무를 많이 표현하는 이유를 알면 그의 그림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경주중·고 미술반 6년 세월 경주 계림숲과 반월성에서 나무 그림을 많이도 그려댔다. “당시 미술반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는 그림만 그렸으니 신이 났죠” 세월이 흘러서도 그는 나무를 그렸다. 붓만 잡으면 나무를 그리고야 마는 것이다. 나무에 찍혀있는 붉고 노랗고 푸른 점들은 ‘태점의 변용’으로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라 했다. 이미애 미술학 박사는 ‘작가에게 나무란 자아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선생의 작풍을 내적 시선(視線)’이라 평했다. 그리고 조그만한 초가집을 그리는데 이 역시 어쩌면 작가 자신인지도 모르는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무한한 하늘아래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심리적 욕구의 발현이리라. 자연과의 합일을 중시한 동양 사상을 심상에 두면서 언제나 나무와 초가집을 주된 모티브로 삼고 지속적으로 창작하고 있는 것. -구상과 추상의 극단적인 대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실험정신 보여 1969년 경북중과 경상중에 재직하면서부터는 활동 무대를 대구로 옮겼다. 이후 한국화 답습과 모방을 벗어나 한국화의 창조적 모습을 만들고자 대구의 여러 한국화 작가들과 뜻을 합쳐 1976년 한화회 창립에 함께 한다. 후일 회장직도 역임했다. 교육자와 작가, 두 가지 영역을 함께 개척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던 중 계명대 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1976)하고 스스로 뜻한 바 창작을 하면서 미술 교육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중시했다. 선생은 1960년대 담채 기법과 1970년대 수묵 선묘 위주의 한국화에서 1980년대 들어 발묵의 굵은 선묘로 대담하게 그린 나무, 세심한 필선, 초가집, 여백의 구도로 화면을 구성했다. 이러한 기법은 1990년대에 부드러운 담묵의 번지기 기법으로 발전했고, 화려한 색감을 보이기도 한다. 홍원기 대구교육대 교수는 “화면속에 이질적인 거대한 수묵 번짐의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면서 빨강과 노랑의 점을 찍어 환상적인 숲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는 구상과 추상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실험정신을 보여준다”고 평하면서 물감의 번짐 효과에서는 수채화의 경쾌하고 맑은 투명성의 특징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2016년 갤러리 쿤스트에서의 ‘먹으로부터의 외출’이라는 11번째 개인전에서는 먹에는 다섯가지 색이 있지만 먹을 사용하지 않고 먹의 효과를 내는 ‘외도’를 시도했다. -퇴임후 방랑과 방황 거치며 기도와 습작 반복하기도 대구서부교육지원청 교육장을 거쳐 경북여고 교장으로 퇴임한 2004년 정년퇴임 기념전에서 선생은 ‘이것을 계기로 그림에 대한 꿈에 불길을 당겨서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정말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달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선생의 말처럼 퇴직 후 선생은 그렇게 소원했던 ‘그림여행’을 떠나면서 화첩에다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을 썼다. 수 십권의 화첩에는 그때그때의 단상과 함께 스케치한 그림들이 빼곡했다. 그의 화첩에 있는 그림과 글 또한 예술작품이었다. 그 속에는 화가 이천우의 진솔한 속살과 고백이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 ‘나 자신을 불태운 작품도 못하고 끝없는 방랑과 방황으로 보낸 세월이었다. 36도가 넘는 폭염속에서 사흘동안 400리 길을 걷기도 하고 산사에 가서 두 달 동안 책을 읽고 기도도 하고 경주 옥룡암, 삼천포 늑도, 간절곶 바닷가 마을에 가서 자취를 하면서 기도와 습작을 반복하기도 했다. 허전한 가슴 여전하던 어느 날, 붓을 잡고 반년을 화실에 쳐 박히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역마살은 그런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붓을 빼앗었던 것.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아 붓기로 했습니다” “팔순까지는 그려보고 싶습니다. 저는 끈질기게는 못그립니다만, 그릴때는 미친 듯 신들린 듯이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놉니다. 내 멋대로 그리고 다양한 시도도 해봅니다. 허허” 선생은 “먹은 색이 변치 않고 종이에 번지는 것과 이미 번진 것을 보고 있으면 안개 같기도 하고 향기의 오묘함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아서 즐겨 씁니다. 마치 여인의 고매한 기품을 닮은 듯 하지요”라고 하면서 이렇게 좋은 먹이 자꾸만 그림에서 밀려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여든이 되기 전에 시도하는 또 한 번의 ‘외출’입니다.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열정을 쏟아 붓기로 했습니다. 요사이 골몰하는 주제는 경주 남산입니다. 여느 작가들처럼, 여지껏 남산을 그렸던 기존의 방식을 답습해 남산을 그리기는 싫습니다. 통념상 해석해 온 문화유산의 해석을 벗어나 신화적인 것이라고나 할까요? 다르게 남산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제가 그린 남산을 누군가 보고 ‘아 남산은 이렇게 그려야하지’ 라고 감탄할 만한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제 스스로 주문을 걸고 있습니다. 대상을 찾아 영감을 얻을때까지 기도를 해서라도 원하는 작품을 그릴 것입니다. 화제(畫題)도 멋지게 달고 싶고요” 그래서 선생은 남산 구석구석을 스케치하고 관련해 떠오르는 화제들을 매번 기록해 두고 있다. 대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밑바탕인 기초 작업으로서. “이 기초 작업이 완성되면 대작을 탄생시킬 넉넉한 공간을 마련해 구상했던 작업을 펼칠 예정입니다. 그 공간이 경주라면 더욱 좋겠지요” 라며 고향 경주에서의 작업을 원한다. “경주에서는 지난해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기획전시 ‘계림전’에서 처음으로 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앞으로 경주에서 제대로 된 큰 전시를 한 번 해보고 싶군요. 경주에서 그린 작품을 경주에서 전시하면 더욱 좋을듯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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