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 가운데 학문과 공부는 자연스러운 일상에 속했고 경치 좋은 곳에 누정(樓亭)을 짓고 장수(藏修, 학문을 할 때 조금도 변함없이 열심히 함)와 유식(遊息, 휴식시간에도 학문에 마음을 둠)을 행하며 자연물을 통한 심신의 안정과 정신수양을 이뤘다. 경북고전번역연구원 오상욱 원장은 “그들은 멀리는 산을 바라보거나 가까운 동산과 명산에 올랐고, 가까이는 정원을 조성해 꽃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을 알려고 애썼고 유교를 바탕으로 학문과 자연의 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산수 유람은 학자의 실천적 덕목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 거죠”라고 설명했다.  유학의 많은 영향 가운데 조선후기 경주부의 경우 옥산구곡가·양좌동구곡, 보문구곡, 석강구곡가, 백련구곡가 등 경주를 대표하는 구곡문화가 있었으며 지역의 수려한 경관과 주변의 화조월석(花鳥月石) 등을 읊조렸다. 이것이 한시로 나타나 시인은 영물시(詠物時) 창작을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도 하고, 사물의 특징이나 본질을 상징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흔히 꽃들이 가지는 상투적이고 아름다운 표현 이외에 꽃에 투영된 작자만의 의미가 핵심인 것. 회재 이언적의 작약, 사가정 서거정의 목단, 몽암 이채의 복숭아와 오얏, 자희옹 최치덕의 소나무, 석노 이능섭의 읍성의 매화, 활산 남용만의 봉숭아와 약초, 화계 류의건의 포도, 송국재 이순상의 귤, 도와 최남복의 늦게 핀 매화, 석산 한문건의 국화 등의 시를 통해 조선의 경주 선비들은 어떻게 꽃을 인식했는지 알아보았다. 소개하는 10수의 시들은 단순한 한자 번역을 넘어 10명의 작자에 대한 소략적 소개와 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곁들였다. 오 원장은 한시 선정 범위를『경주문집해제』의 서명별 286종과 저자별 284종 가운데 화수(花樹)를 시제로 삼은 작품을 위주로 했으며 소재를 통해 인물이 겪은 상황에 비춰 해설을 했다. 10인의 각양각색 다양한 화담 스토리 중 지면관계상 한 수 씩만 가려 실었고 이는 오 원장의 해석에 따랐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晦齋集』 ‘易枯胡地顔(이고호지안) 오랑캐 땅에 와서 얼굴 쉽게 시드니/ 長怨漢恩薄(장원한은박) 한나라의 박한 은혜 길이길이 원망하네/ 滿面憶歸愁(만면억귀수) 돌아가고 싶어서 얼굴 가득 시름 담고/ 無心理鬢綠(무심리빈록) 검은 머리 빗을 생각 조금도 않는구나//’ -절작약(折芍藥, 작약을 꺾다) 전문. 회재는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해 이황에게 전달한 인물이다. 독락당과 계정 그리고 옥산구곡의 형성에 이바지한다. 오상욱 원장은 “선비들은 목단과 작약을 늘 함께 심어 관상하기 좋아했습니다. 회재 선생은 조선중기 사화를 모두 겪은 이로 산수를 바라는 마음이 크게 여유롭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당대 동시대를 살았던 서거정 선생과는 유배의 설움과 아픔을 같이 하며 늘 같이 있었고 작약시는 같은 시기 유사하게 피는 모란과 작약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1491~1553)),『四佳詩集』 ‘東君捲却一春殘(동군권각일춘잔) 봄의 신이 봄을 걷어가 쇠잔해지니/ 當日風流屬牧丹(당일풍류속목단) 당일의 풍류는 모란꽃에 맡기었네/ 欲識無心動人處(욕식무심동인처) 무심히 사람 감동시킴을 알고자 하는데/ 午醒初解憑闌干(오성초해빙란간) 낮잠 깨어나 난간에 기대니 비로소 알겠네//’ -모란(牡丹) 전문. 서거정은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지리·의약·성명·풍수에까지 관통했던 이다. 문장과 시에 능통했으며 워낙 산수를 좋아했고 경주에서 경치가 빼어난 12곳을 뽑아 경주십이영(慶州十二詠)이라며 따로 읊은 이다. 그만큼 경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경주의 대표적 학자인 회재와는 동시대 회한을 가지며 여러 문인들처럼 늘 정원에 함께 피는 모란과 작약을 대비했다.-몽암 이채(蒙庵 李埰(1616~1684)),『蒙庵集』‘滿園紅白媚春輝(만원홍백미춘휘)정원 가득 아름다운 홍백의 봄빛/ 任逐東風䔩䔩飛(임축동풍수수비) 동풍을 따라 우수수 떨어지네/ 爭似庭前梅與菊(쟁사정전매여국) 마치 뜰앞의 매화와 국화가 다투는 듯/ 好將淸節傲寒威(호장청절오한위) 장군의 맑은 기개를 좋아하고 추위를 업신여기네//’ -도리(桃李, 복사꽃과 오얏꽃) 전문. 몽암은 여강이씨로 회재보다 60년 뒤 후손이다. 1669년(현종 10)에 경주부윤 민주면 등과 『동경잡기』를 편찬했으며 17세기 경주지역 사정과 신라시대 전설·역사·풍속·문물 등을 매우 풍부하게 수록한 이다. 울산 구강서원 건립과 울산학문 형성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몽암 역시 자연을 사랑했고 산수를 아꼈다. 몽암 이채는 14수의 한시를 통해 정원에 심겨진 온갖 화수에 대해 감흥을 읊조렸다.-자희옹 최치덕(自喜翁 崔致德(1699~1770)),『자희옹선생실기』‘有亭池上起(유정지상기)못 위에 우뚝 선 종오정(從吾亭)/ 邀客共登臨(요객공등림) 손님을 맞아 함께 올랐네/ 憑檻波紋細(빙함파문세) 난간에 기대니 파문이 작게 일고/ 開牕冷氣侵(개창냉기침) 창문을 여니 냉기가 스며져드네/ 松梅森左右(송매삼좌우) 소나무와 매화가 좌우에 가득하고/ 魚鳥戱飛沈(어조희비침) 물고기와 새들은 자연의 모습이라/ 最愛論文夜(최애논문야) 밤늦도록 글 논함을 좋아해서/ 慇懃霽月尋(은근제월심) 은근히 밝은 달을 찾아보았네//’ -지정(池亭, 못과 정자) 전문. 자희옹은 손곡 사람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노친을 봉양해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다. 부친 최두만과 종오정을 건립해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등 수종들을 가꾸는 과정에서의 시가 많다.  이 시는 연당(蓮塘, 못)과 종오정(從吾亭)의 풍경을 읊은 작품이다. 최치덕은 연당위에 종오정을 짓고 문사(文士)를 맞아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 이는 그의 한가로운 생활 가운데 가장 흡족할 만한 모습이며 문사와 종오정 그리고 문장과 달빛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 자연의 한 모습처럼 동화되었다. 한편, 자희옹은 동시대 인물들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이다. 불러들인 손님 중 경주부윤 홍양호, 자희옹과 절친했던 지연정사의 활산 남용만, 그 아들 남경희, 손덕승, 이순상 등이 종오정에 다니러온다. 오 원장은 이들이 오가며 교류했던 길을 선비길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조선 선비의 옛길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기록으로 있는 것이다.-노석 이능섭(老石 李能燮(1812∼1871)) 노석유고(老石遺稿) 이능섭은 양동사람으로 경주부윤(1871. 6~1871. 9)재임시 한적한 가을 달밤에 경주읍성의 동헌인 일승각에서 지은 영매(詠梅) 시가 돋보인다. 그는 조매(早梅), 홍매(紅梅), 납매(蠟梅)등 매화를 다양하게 읊었다. 경주 읍성 복원이 한창인데 동헌내에도 매화가 많았다니 증거 자료가 될 수 있겠다. 시는 생략. -활산 남용만(活山 南龍萬(1709~1784)),『活山集』 ‘無梅且莫歎(무매차막탄)매화나무가 없어 시를 읊조리지 못하고/ 花盡實應團(화진실응단) 꽃이 다해 열매가 달렸네/ 未作調羹用(미작조갱용) 매실이 없어 국맛을 조절못하고/ 徒添寓味酸(도첨우미산) 다만 임시로 신맛을 보탠다네//’-구종매수부득(求種梅樹不得, 매화나무를 구하지 못하다) 전문. 활산은 영양 남씨로 자희옹과는 친구사이다. 장인이 화계 유의건 선생이었으며 학문적 붕우였다. 영조 32년(1756)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보지 않았다. 이는 영조때 노론이 득세를 하고 영남 사림들은 설 자리가 없었으니 실력은 있으되 과거엔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명활산성 아래 한한정(閑閑亭)을 짓고 학문에만 전심해 강학한다. 이 시는 은나라 고종이 부열을 정승으로 임명한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신맛은 바로 작약을 말하며, 매실이 없으니 임시로 작약을 쓴 경우를 말한다. -화계 유의건(花溪 柳宜健(1687~1760))『花溪集』 화계는 1735년 4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화계서당에서 강학하고 후학양성에 매진한다. 서산 류씨로 노론계적 인물이었다. 즉 경주 유림들과는 격을 두고 산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최치덕, 남용만과 매우 교류가 깊었고 그 중 리더였다. 부윤 홍양호는 ‘경주의 거유’라 칭했으며 18세기 경주 학문의 중심이었다. 나릉진안설(당시 박,석,김 왕릉에 대한 비정을 신랄히 비판)발표해 당시 유림들 눈에 벗어나는 이유가 된다. 시는 생략하고 시제를 풀어서 싣는다. ‘집에 심은 포도 한그루가 자못 무성하였으나 중간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몇 년 사이에 다시 새로운 싹이 나서 작년에 비로소 덩굴이 담장을 타고 자랐다. 올해 드디어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렸고, 용수철처럼 길게 이어져 구슬을 실에 꿰어 만든 발처럼 무성하였다. 마침 부윤이 부임하던 날이었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이로써 몇 꼭지를 따서 드리고, 겸해서 나의 비루한 뜻을 적노라’ ‘겉이 희고 속이 검기 보다는 겉은 검어 보이나 속이 흰 포도를 닮으라’는 의미로 선비들은 포도를 심었다고 한다.  권세와 시류에 아첨하기 좋아하고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틈만 생기면 별반 하는 일 없이 단물만을 쫓는 정치 모리배들에게 포도로 비유해서 일침을 내렸다. -송국제 이순상(松菊齋 李舜相(1659~1729))『松菊齋遺集』 ‘黃金壓紋凡(황금압문범) 황금색의 압도적인 무늬/ 照我病殘翁(조아병잔옹) 늙고 병든 나를 비추네/ 懷著陸生孝(회저육생효) 육속(陸續)의 효행을 품고/ 頌輪屈子忠(송륜굴자충) 굴원(屈原)의 충언을 기리네/ 霜濃洞庭樹(상농동정수) 서리와 이슬 가득한 동정호의 귤나무/ 月上廣寒宮(월상광한궁) 달 위의 광한궁(廣寒宮)이라/ 莫渡江南水(막도강남수) 강남의 물을 건너지 마라/ 天姿恐不同(천자공부동) 자연의 모습 다를까 걱정하네//’ -견귤(見橘, 귤을 보다) 전문. 이순상은 경주 이씨로 특히 경주 관련 시를 많이 남긴 이다. 화계 유의건, 양동마을 손덕승 등과 당대 교류했던 인물이다. 노론계 학파 핵심인물로 효행과 학문을 장려 했으며 경주관청 기록물을 남기기도 했다. 이 시는 당시 귀했던 귤을 보며 중국 후한 오군 사람이었던 육적의 고사를 인용해 효행을 이야기한 시다. -도와 최남복(陶窩 崔南復,1759~1814)『陶窩集』 경주 최씨로 영물시를 많이 남긴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집청정과 대곡천 상류에 ‘백련구곡’이라는 구곡문화를 만들었으며 백련정을 지었다. 울산구곡문화의 효시로서 은거해 살며 벼슬을 하지 않았고 산수 유람을 즐기면서 다양한 학파와 교류했다. ‘영정매(詠庭梅 뜰의 매화를 읊다)’를 지었는데 시는 생략한다. 내용은 임금(순조)께서 여러 달 병상에 계셨기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걱정이 많았고 임신년(1812) 4월 23일 건강을 되찾았기에, 사면의 글이 내려져 이에 감흥을 받아 이 시를 지었고 긍정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곡산 한문건(石山 韓文健(1765~1850))『石山集』 ‘難扶衰脚向東籬(난부쇠각향동리)힘없는 다리를 이끌고 동쪽울타리로가서/ 故把寒叢座上移(고파한총좌상이) 자리에 앉아 떨기째 움켜쥐고 잡아 옮긴다/ 物我人間同氣味(물아인간동기미) 사물과 자아는 같은 성격이건만/ 盆花不是避霜威(분화불시피상위) 화분의 꽃은 서리 찬 기운을 피하지 않는가?//’ -분국(盆菊, 화분의 국화) 전문. 곡산은 건천 금척 집성촌 곡산 한씨로 전국 구곡 중 산을 중심으로 독특한 구곡문화를 읊조리며 석강구곡을 형성한다. 당시 경주 중심에 있던 유림들 경주 최씨, 양동 이씨, 경주 손씨들은 워낙 세력이 컸다. 외곽지이면서 세력이 약했던 이들의 울분은 컸을 것이고 늘 글을 쓰더라도 한이 서려있고 이에 자신들만의 세력을 석강구곡으로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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