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욱의 경주 조선스토리 [21] 손곡동의 송암고택을 찾아서  경주시 손곡동은 경주최씨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조선후기의 선비문화가 잘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대표적으로 정원조성과 연꽃이 아름다운 자희옹 최치덕(1699~1770)의 종오정(從吾亭)과 그의 후손 최찬해(1884~1960)의 만송정(晩松亭) 그리고 소담한 건축물이 인상적인 지당 박만흥(1678~1742)의 요수재(樂水齋)와 그의 후손 박경순(1801~1879)의 송암고택(松菴古宅) 등 조선의 선비문화가 공존한다.  그 가운데 요수재 뒤편에 위치한 송암고택은 무려 179년의 오랜 역사를 갖는 건축물로, 1839년 송암(松菴) 박문화(朴文華,1756~1817)의 손자 박경순에 이르러 세워졌다. 최근 박씨문중에서 새롭게 보수하고, 그의 호를 따서 송암고택이라 명명하였다. 특히 5칸 한옥의 목조 겹집(대들보를 중심으로 여러 채가 겹으로 배치된 가옥)으로, 소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며, 벽은 수숫대로 얽고 황토로 마무리하고, 기둥과 대들보는 통나무를 그대로 가공하고, 마룻장은 통나무를 한 면만 가공해 깔고, 부엌문받침은 원목을 그대로 가공·설치하는 등 요즘은 잘 보기 힘든 구조의 건축양식을 갖추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대들보에 “道光拾玖年己亥三月初四日卯時立柱 初八日巳時上梁”글자가 노출되어 보이며, 기해년(1839) 3월 4일에 기둥을 세우고, 3월 8일에 상량한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였고, 청나라 연호 도광(道光)을 사용하였다. 요수재의 주인 지당(智堂) 박만흥(朴萬興,1678~1742) 이후의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다.인당(仁堂) 박세운(朴世雲,1717~1778)-송암(松菴) 박문화(朴文華,1756~1817)–박상현(朴尙賢,1780~1817)-박경순(朴慶淳,1801~1879)-박기선(朴基璇,1830~1853)-박장호(朴章鎬,1858~1928)-박태안(朴泰安,1880~1946)-월계(月溪) 박춘동(朴春東,1905~1949) 등의 가계 가운데, 1839년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박경순 이후 6대가 거주하였고, 이후 후손의 부재로 소실될 것을 우려해 2017년 11월 박씨문중에서는 연구보존을 위해 동옥계(東玉契)를 조직해 건축물을 매입해 보수하고, 2018년 6월에 준공식과 화수회를 개최하였다.송암 박문화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沈)과 고려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박언부(朴彦浮)의 후손이며, 박만흥의 손자, 부친 박세운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려진 정보가 소략하지만, 그는 숭덕전 참봉을 지냈고, 학문과 실천적 행동이 뛰어났으며, 형 죽재(竹齋) 박문찬(朴文燦)과 더불어 부모 섬기길 잘 하였다고 족보에 전한다. 게다가 그의 행적 가운데 효행에 관한 실천적 자세는 부친과 조부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조부 박만흥은 오로지 예학에 마음을 쏟았고, 부친 박세운 역시 효행을 바탕으로, 현손 박경순에게까지 계승된다. 게다가 3대에 걸친 애절한 사연이 함께 전하는데, 박경순의 부친 박상현과 조부 박문화는 돌아가신 해가 1817년으로 같았다. 11월 27일 부친 박상현이 뜻하지 않게 죽고, 하루 차이로 다음날 28일 조부 박문화마저 돌아가시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이후 함께 동방(도지)에 산소를 두었다 전한다. 졸지에 부친과 조부를 함께 잃은 손자 박경순은 슬픔에 잠기었고, 진솔한 마음을 담아 부친과 조부의 덕을 기리기 위해 손곡동에 집을 짓고 사모함을 다하였으니, 기구한 삶에 대한 손자의 애틋한 정이 송암고택 건축물로 승화하였고, 게다가 2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동방의 산소를 손곡동으로 옮겼으니, 이처럼 박씨문중의 선조에 대한 마음은 더없이 애중(愛重)하다. 이처럼 집안자체가 대대로 효행을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도 집안의 자제들에게 효행을 권하는 시[詩,출전:박씨문헌록(朴氏文獻錄)]가 전하는데,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行孝方可人(행효방가인) 효도를 행한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거늘非孝豈爲人(비효기위인) 효도하지 않으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我則已誤人(아즉이오인) 나는 이미 효도하기에 그릇되지만望汝克爲人(망여극위인) 너희들은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인물은 때를 잘 만나야 이름나고, 건축물은 인물을 잘 만나야 오래가는 것처럼 1839년에 세워진 박경순의 고택은 179년이 흐른 2018년에 이르러서야 박씨문중 후손의 뜻을 만나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앞으로 현판 기록과 인물에 대한 고증적 자료를 수집해서 건축물과 인물의 가치를 높이고, 나아가 인물의 조명과 건축물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 비지정문화재의 안타까움에서 벗어나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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