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외냉국-안도현 외가에서는 오이를물외라 불렀다금방 펌프질한 물을양동이 속에 퍼부어주면 물외는좋아서 저희끼리 물 위에 올라앉아새끼오리처럼 동동거렸다그때 물외 팔뚝에소름이 오슬오슬 돋는 것을나는 오래 들여다보았다물외는 펌프 주둥이로 빠져나오는통통한 물줄기를 잘라서양동이에 띄워놓은 것 같았다물줄기의 둥근 도막을반으로 뚝 꺾어 젊은 외삼촌이우적우적 씹어먹는 동안도닥도닥 외할머니는 저무는부엌에서 물외채를 쳤다햇살이 싸리울 그림자를마당에 펼치고 있었고물외냉국 냄새가평상까지 올라왔다 -‘물외냉국’이 있는 여름 저녁 풍경 7-80년대 근교의 여름 저녁은 어떻게 왔던가? “햇살이 싸리울 그림자를 마당에 펼치”는, 뜨거운 대지의 열이 아직 다 식지 않은 시간, 일에서 돌아온 어른들은 땟국에 절은 내의를 벗어던지고 펌프물로 등멱을 하곤 했다. 어김없이 멍석 주위에는 모깃불 연기가 피워 올려지고. 그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속에 이런 스냅 사진 한 장은 가지고 있으리라. 이 시는 그 시절 여름 풍경의 한 도막을 음식에 담아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 새로운 감각을 만나 우리 삶에 얼마나 신선한 자극을 주는가도 알게 한다, 시는 이렇듯 우리네 삶을 보여주면서도 세상 처음 보는 감각을 선사해주는 보배로운 선물이다. 더위에 지친 심신을 식혀주는 반찬으로는 물외(오이)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물외가 물 위에 올라앉아 새끼오리처럼 동동거린다고? 물외 팔뚝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다고? 양동이에 둥둥 떠 있는 긴 타원형의 누런 갈색 오이, 그 까칠한 모양을 떠올리고 우리는 무릎을 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비유가 당돌하게 결합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이다. 감각의 압권은 오이와 ‘물줄기의 둥근 도막’의 비유. 젊은 외삼촌이 “물줄기의 둥근 도막을/반으로 뚝 꺾어/ 우적우적 씹어먹”는단다. 하하. 유쾌하다. 내 속이 다 뻥 뚫린다. 여름 더위를 물리칠 만큼 시원한 이런 구절 때문에 시를 읽는 거다. 그 사이 외할머니가 부엌에서 친 물외채를 넣은 물외냉국, 싱싱하고 구수한 비린내가 평상까지 올라온다. 입맛이 다셔진다. 여름 저녁답의 정서를 이만큼 살뜰히 음식에 담아낸 시가 있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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