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검은색 뭔가를 발견한 곳은 높고 깊은 선반 안에서였다. 투명 테이프를 여러 겹 두른 걸 보니 뭔가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어? 뭐지?’ 그걸 역시나 정성들여 풀어보니 ‘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결혼할 때 집에서 챙겨온 내 사진들이었다. 빛바랜 흑백의 돌 사진에서부터 까까머리 중고생 시절,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던 대학시절까지 내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중요하다고 따로 보관했던 모양인데 그 사실마저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식량을 어디다 잘 감춰놓고는 숨겨둔 장소를 까먹어 정작 본인은 먹지도 못 한다는 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딱 이 경우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고 그 녀석 귀여운 짓을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내 기록들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치울 게 산더미인데도 한 장 한 장 설레는 마음으로 추억을 되짚어 본다. ‘아, 이때부터 탈모의 조짐이 보였구나…’, ‘그래, 그땐 잠자리 안경이 유행했었지’ 하며 혼자 낄낄댄다. 당시엔 유행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심히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리고 하나같이 어색하게 웃는 사진뿐이다. 그렇게 배운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그걸 사진 예절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텐데, 죄다 얼굴은 억지웃음에 손은 검지와 중지로 만든 ‘브이’다. 요즘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만든 ‘작은 하트’와 아마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익숙한 웃음도 어떻게 사진기만 들이대면 자연스레(?) 어색해지는지 모르겠다. 뿐이랴. 사진기 너머 엄마나 이모들은 왜 꼭 비스듬히 서 있고, 삼촌이나 아저씨들은 왜 또 그렇게 얼굴이 심각해지며, 참새마냥 잘 웃던 애들도 ‘더, 더’ 하는 어른들의 주문에 점점 얼굴이 어색해져만 가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냥 스냅사진 찍듯 자연스럽게 찍으면 될 걸, 꼭 ‘하나~둘~세엣’ 해가며 억지를 조장하는 것도 물론이다.
멀쩡한 사람도 힘 빠지게 만드는 카메라 렌즈를 다르게 만지작거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필립 할스만(1906∼1979)이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즈음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다.《라이프》지(誌)에 가장 많은 표지사진을 장식해서 인물사진의 대가라는 소리를 듣던 할스만은 특히 소위 ‘점핑 샷’을 찍는 것으로 유명했다. 점핑 샷은 글자 그대로 대상이 점프를 할 때의 모습을 찍는 거다. 사진기를 든 할스만이 말한다.
“자, 높이 뛰어보세요.”, “조금만 더요, 더….” 사람들은 더 높이 뛰어오르는 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카메라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긴장감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할스만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린 거다.
아주 과학적이며 심리적이라 효과도 컸다. 배우 오드리 헵번, 마를린 먼로가 그렇게 뛰었다. 얼마나 크게 웃었던지 얼굴의 반 이상이 입이다. 배우이자 (모나코)왕비인 그레이스 켈리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도 그렇게 뛰었다. 영국의 윈저 공, 화가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등 많은 유명인들도 동참했다. ‘내면을 위해 기꺼이 디자인(겉모습)을 포기한다’는 할스만의 철학에 동의해서였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줄넘기 시험을 본다고 울상이다. 줄넘기를 잘 못하기 때문이다. 줄넘기를 할라치면 몸과 발, 그리고 팔이 따로 논다. 게다가 줄까지 넘어야 하니 어린 녀석이 힘들었나 보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하고 또 해보지만 도저히 안 되나 보다.
고개를 다리 사이로 파묻고 있기에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프리카 마사이족(族) 춤 알아? 사실 아빠는 그 춤의 대가야!”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고개를 든다. 비장하게 일어난 아빠는 제자리에서 높이뛰기를 한다. 있는 힘껏 높이 오른다. 하나 둘~ 번호까지 붙여가며 리듬을 탄다. 의외로 너무나 간단한 춤(?)을 추자 녀석도 웃겼는지 따라 흉내를 낸다. 그 리듬을 머리가 아닌 녀석의 온몸으로 느낄 즈음에 녀석 손에 줄넘기를 쥐어줬다.
“손이 심심하니까 이걸 흔들면서 넌 계속 춤만 춰봐” 녀석은 아주 감각적으로 마사이춤을, 아니 줄넘기를 넘고 있었다. 아주 신난 얼굴을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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