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년, 회재 이언적선생이 양재역벽서사건(정미사화)으로 강계로 귀양을 떠났다. 하나뿐인 아들 잠계, 전인은 아버지와 동행하였다. 한양에서 평안도 강계...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중강진 아래, 옛 고구려의 도읍지로 길을 떠났다. 강계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만주지방과 잇대어 있다. 남쪽으로 나지막한 산들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삼아 생활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회재는 6년의 귀양생활 끝에 생을 마쳤지만 하나 뿐인 아들이 봉양하고 임종까지 지켰다. 그리고 평생의 학문을 정리한 책도 썼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이 담긴 글과 손때 묻은 책들, 유품까지 챙겨 음력 11월, 한 겨울 혹한을 뚫고 멀고먼 고향으로 내려온 아들, 잠계! 아버지 회재는 이런 아들을 두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이심전심! 그래서 지금도 전해지는 말, ‘무잠계면 무회재(無潛溪 無晦齋), 효자 잠계가 없었다면 아버지 회재는 신원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으로 돌아온 잠계는 독락당 곳곳에 묻어 있는 아버지의 손길과 눈길을 떠올리며 회한으로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어도 신원되지 않으면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계는 안동, 퇴계를 찾아가 부친의 학문을 알리니 ‘회재는 나의 스승’이라는 한 마디 말로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후에는 조선시대의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젊은 시절, 선생이 과거를 볼 때 시험관이었던 모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회재의 책문을 보고 ‘임금을 보좌할 재주를 지녔다’고 평가할 정도로 회재의 학문과 인품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관원공 박계현(1524~1580)의 역할도 지대했다. 잠계는 아버지가 남기신 서책과 더불어 자신이 직접 쓴 서찰을 아들 ‘준’을 보내 전후사정을 알렸다. 이에 관원공은 느끼는 바가 있어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많은 관료들이 회재의 무고함을 증언하면서 신원되었다. 그 상소를 보면 “선대의 바른 신하, 이언적은 오랫동안 끊겼던 학문을 옛 경서에서 얻었고 오가는 몸가짐이 바릅니다. 비록 당시에 윤원형 이하 간신들이 나라를 주무르며 을사사화로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양재역 벽서사건’을 날조하여 동조하지 않는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이에 회재는 죄를 받아 머나먼 땅에서 죽었으나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김굉필의 옛 일에 의거하여 특별히 대관을 증직하시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소서” 관원공의 장계가 불씨가 되어 조정에서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선조께서 말씀하시길 “을사년 이후에 윤원형 일파에게 죄를 받았으나 허물이 없는 자들이 매우 많다... 고(故) 권벌은 덕행을 갖추고 충성 또한 지극했으며 고(故) 이언적은 학문이 자세하고 깊이가 있으니 성리학의 으뜸으로서 유배 중에도 조정을 걱정하던 그 충성이 크다”고 하셨다. 이에 회재는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 후, 1568년에 ‘문원(文元)’의 시호가 내려지며 조선시대 큰 스승으로 명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제야 관원공은 독락당을 찾아 잠계와 마주하였다. 가슴에 품은 얘기들을 나누며 밤은 깊어가고... 다음날 관원공은 독락당과 4산 5대를 비롯하여 회재의 발길과 손길이 닿았던 곳들을 둘러보며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옥산의 아름다움을 ‘자계 16영(慈溪 16詠)’에 그대로 담았다. 잠계도 이를 감사히 받아 음각하여 현판을 만들어 사랑방문 위에 걸어두고 그 고마움을 되새겼다. 그리고 잠계는 눈을 감았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판을 보면 대대손손 지켜온 잠계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세월이 가면 잊기 쉽건만 오랜 세월 내려온 그 마음을 나는 이곳에서 본다. 1572년(선조 5년), 서원이 세워지며 이듬해 조정에서 옥산서원 현판이 내려와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1610년(광해군 2년), 동방오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현재 이언적선생을 모시는 옥산서원의 향례는 가장 예스럽게 행해지는 곳으로도 이름이 높다. 관원공이 읊었다는 ‘자계 16영’중에서 ‘계정(溪亭)’을 보자.박소계정압수두(朴素溪亭壓水頭) 소박한 계정은 물길 누르고 우뚝하고십년심계일토구(十年心計一菟裘) 십년을 꿈꾸다 이제야 지었네당시수종송겸죽(當時手鍾松兼竹) 선생이 손수 솔과 대를 심었다니전승풍상열기추(戰勝風霜閱幾秋) 그 세월을 이겨내고 몇 해가 지났는가 아버지가 신원되었음에도 전인은 볼 수 없었다. 전인은 먼저 아버지 곁으로 가서 그 간의 일들을 아버지께 얘기하고 있는 걸까? 생전에 어리광 한 번 부리지 못한 아들, 장성한 아들을 이제야 품에 안고 토닥이는 걸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아버지를 그리며 계정, 관어대 건너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을까! 무심하게도 물은 흐르고 고기는 뛰어 놀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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